도서관에 갔다가 [즐거운 어른]이라는 책을 빌려 왔다. 저자가 내가 좋아하는 김하나 작가님의 어머니라는 것도 좋았지만 목욕탕에 나란히 앉아 있는 3명의 할머니가 그려진 표지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앞선 세대를 살아간 쿨한 어른에게 인생 별 거 없다는, 너무 애쓰지도 말고 그저 현재를 즐기며 살라,는 조언을 듣는 기분이기도 했고, 요가와 헬스, 독서, 여행 등 하루를 취미생활로 가득 채운 일상 이야기를 읽으면서 노년 생활이라고 해서 지루하고 심심하기만 할 거라는 편견을 깨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읽으면서 자꾸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12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큰 오빠네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살았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셨고 먹고사느라 한글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큰 오빠네 집에서 독립해 공장에 취업을 해서 아빠를 만났고 20살에 아빠와 가정을 이뤘지만 없는 사람 둘이 만나도 있는 사람들이 될 수는 없는 시대였기에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 온갖 노동을 하셨다. 어릴 적 기억하는 엄마 모습은 마당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사포로 돌을 닦는 부업을 하는 거나 뜨개질 거리를 한아름 쌓아놓고 뜨개질 부업을 하는 모습이나 장미꽃을 접는 부업이나 인형코를 꿰매는 부업을 하는 모습 등이다. 내가 좀 더 크고 태백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김장철이 다가오면 엄마는 새벽마다 배추작업을 나갔는데, 등교를 하는 길에 저 높은 곳에서 배추작업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아빠가 워낙 고지식하고 보수적이어서 엄마가 밖에 나가 일하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엄마는 온갖 부업으로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탰다.
자식 셋을 다 키우고도 엄마의 노동은 끝나지 않았는데, 우리 딸을 시작으로 언니네 아들 둘, 동생네 아들까지 손주4명을 키우셨다. 깍두기, 열무김치, 물김치, 배추김치 부터 늘 반찬을 해서 자식들 집에 싸서 보냈고 엄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아빠 때문에 해외 여행은 커녕 친구들(친구라고 할만한 인간관계도 없으시다. 예전에 살았던 또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동네 어르신들이 엄마의 친구다)과 국내 여행 한 번 다녀오신 적이 없었다. 2대 독자인 아빠네는 왜 이렇게 제사가 많았는지 엄마는 1년에 제사만 10번 가까이를 지냈는데, 나 역시 독립을 하기 전까지 제사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남아있어 살림은 못했어도 전은 기가 막히게 부쳤다. 엄마의 공간은 늘 집 근처로 한정되어 있었고 온갖 노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엄마는 엄마를 위해 산 적이 없었다. 결국은 다 같은 성을 가진 아빠와 우리 3남매를 위해서만 엄마의 삶은 돌아갔다.
다행히 5년 전부터 엄마는 엄마의 인생도 살기 시작하셨는데, 시에서 하는 학습관에서 한글 공부를 시작하셨다. 가나다라 부터 시작했던 한글공부로 엄마는 이제 카톡도 보내고 왠만한 글자는 읽고 쓰신다. 운동도 시작하셨는데, 시에서 운영하는 학습관에서 요가를 배우시다가 지금은 필라테스 학원에서 어르신을 상대로 하는 근력운동을 하루 한 시간씩 하신다. 자식들이랑 해외여행은 두 번 다녀왔고 국내 여행은 자식들이랑 자주 다니는 편이다. 아빠가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약해져 제사도 많이 줄였는데, 지난 해부터는 추석에는 제사를 안 지내고 성묘만 하기로 해서 엄마의 부담이 조금 더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치를 하고 반찬을 해서 자식들한테 싸주는데,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끊지를 못하신다. 그래서 엄마의 낙이려니 하고 되도록 감사하게 받아 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결국 [즐거운 어른]은 읽다가 중도포기했다. 카프카식으로 말하면 내 안의 얼음을 깨는 도끼같은 어른의 이야기는 [즐거운 어른]보다는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이다. 평생을 노동했지만 명함 한 장 없었던 여성들의 이야기. 우리 엄마 시대 너무 당연하게 강요됐던 여성들의 희생과 그림자 노동, 자신의 이름 보다는 엄마나 며느리, 아내로 불린 여성들이 고군분투하며 닥친 현실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승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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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한 표현이지만 엄마의 존재를 '공기같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엄마의 노동, 그리고 지금 시대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는 필수 노동들 역시 너무 흔해서, 공기 같아서 우리는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엄마가 엄마의 인생을 잘 살 수 있기를 응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돌봄 노동이나 학교 급식 조리사 노동자분들의 열악한 처우나 청소 노동자분들의 처우 개선 등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한다. 멋지고 쿨한, 즐거운 어른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회적 고통과 아픔에 함께 슬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리고 늘 우리 사회 많은 '엄마'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