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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행복
  • 철학의 쓸모
  • 로랑스 드빌레르
  • 16,920원 (10%940)
  • 2024-08-20
  • : 36,812

  내년에 고3이 되는 딸은 미대를 가는 게 꿈이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학원을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미술학원이었다. 딸은 미술에 취미도 있고 소질도 있어서 초1부터 중3까지 꾸준히 미술학원을 다니다 고1이 되면서 입시미술로 옮겼다. 딸의 꿈은 도슨트가 되는 것인데, 수어를 배워 청각장애인에게 그림을 수어로 설명해주고 싶다는 꿈도 있어 틈틈이 수어도 배우고 있다. 


  얼마전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있었고 딸은 심한 목감기와 몸살감기에 걸려 시험 내내 고생을 했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아가며 공부를 했지만 감기로 인해 컨디션은 최악이었고 시험 결과 역시 좋지 않았다. 딸의 학교에서는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 각 가정으로 시험성적표를 보냈는데, 딸의 성적표를 아무리 부모라도 우리가 먼저 보면 안되고, 성적표 역시 딸이 보여주고 싶을 때만 보여준다는 암묵적 룰이 있어 딸 책상에 올려뒀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어제 미술학원을 다녀와 간식으로 토스트를 먹겠다며 신나하던 딸에게 성적표 왔는데 봤냐고 물었다. 딸은 그제야 성적표가 왔냐며 책상을 뒤져 성적표를 찾아 보더니 소파에 앉아 우울모드로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성격이 워낙 밝은 딸이라 우는 모습을 보면 유난히 마음이 아픈데 감기에 걸려 힘들게 공부한 딸을 봐서인지 어제는 마음이 더 아팠다.


  딸은 속상한 마음에 대입은 망했고, 자기 인생은 끝났고, 이번 시험은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아 좌절감이 심하고, 그림 실력 역시 잘 늘지 않아 슬럼프 같다며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라고 내가 한 말은 "고통없는 삶은 없어."였다,


  "하은아, 고통없는 삶은 없어. 사는 건 감당해내는 거야. 매 순간 거친 파도가 닥치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가 닥치기도 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파도를 감당해내는 거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저 묵묵히 견뎌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행운이 닥치기도 해.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데, 왜 미래를 미리 걱정해. 미래는 여백으로 남겨두고 지금 닥친 고통에만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걸 행동으로 옮겨야 회복탄력성으로 내일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딱 시험을 못 봤다는 그 만큼만 속상해해.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많아. 기대할 것도 많고 대입이 네 인생 끝이 아니야. 다른 무궁무진한 기회들이 엄청 열려있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그래야 기회도 행운도 널 따라 오는 거야. 사는 게 원래 만만하지 않아."


  우리는 철학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철학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냐고 생각해서 철학은 그저 뜬구름잡는 얘기라고 치부할 때도 많다. 그런데 어제 나는 최근에 읽은 [철학의 쓸모]에 나온 책구절로 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려고 했다. 그 말은 나 역시 위로를 받았다는 얘기겠지.



  로랑스 드빌레르의 [철학의 쓸모]는 '의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데, 현실은 너무 잔인해서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굴러갈 때도 많다. 당장 내일 일도 예측할 수 없고 이미 벌어진 일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철학은 우리가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어도 내 삶의 주인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내 앞에 닥친 현실, 고통, 시련을 어떻게 마주할지, 어떻게 통과할지 스스로 내가 정할 수 있음을.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임을 때 깨닫는 것처럼 내 앞에 벌어진 일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지는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철학은 현실을 바꿔 줄 수는 없지만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 바로 앞에 닥친 고통을 치유해줄 수 있다. [철학의 쓸모]는 이런 고통들을 철학이 어떻게 의학으로서 기능하는지를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나태에 대해서는 니체의 '단기적 습관을 추구하라'는 사유를 통해 철학 처방전을 내려준다.


  "나는 단기적인 습관을 사랑하며, 이것이 '수많은' 사물과 상태를 알게 해주는 더없이 귀중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단기적 습관이라는 처방전은 다양한 활동을 권장하지 않는다. 니체는 한 자리에서 오래 지속되는 것들, 즉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습관의 편안함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질병을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투에 빗대 병에 걸리는 것을 패배로 보고, 병을 극복하는 것을 승리로 보는 질병의 은유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의 처방전을 내려준다.


  "질병은 은유가 아니며, 질병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이자 환자가 되는 건강한 방법은 질병에 따라붙는 잘못된 은유에 저항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질병은 다만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른 삶에 속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우리는 건강의 세계와 질병의 세계라는 두 세계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건강의 세계에서 쓸 여권을 갖고 싶어 하지만, 잠시라도 질병의 세계에 다녀올 수밖에 없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닥치게 마련이다."


  [철학의 쓸모]는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지를 알게 해주는 책이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고통스러울 때, 슬플 때나 아플 때 전에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위로받기도 하고 치유받기도 했는데, 이제는 묵묵히 속으로 감내하고 그럴 때 일수록 말이 더 없어진다는 거다. 이 책은 고통을 속으로 삭히며 혼자서 묵묵히 헤쳐 나갈 때 처방전이자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는 책이다. 


  아이 둘을 키우고 반려동물과 함께 하면서 여실히 느낀 점 중 하나는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없고, 예상치 못한 온갖 고통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시작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감정, 생각들을 직시하고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큰 용기를 내게 한다.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무너지지 않고 강하고 단단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모할 정도의 용기. 


  딸은 다행히 속상한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부은 눈으로 토스트를 맛있게 먹었다. 요즘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너무 살기 힘든 세상이다. 부모로서 아들도 딸도 삶은 원래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산다는 게 시련을 견디는 일임을 인식하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감당해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의 쓸모 역시 알아주면 좋겠지만 엄마의 바람이겠지.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고전을 가진 채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  지만 원한다면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시간에, 이런저런 환경에서, 이런저런 얼굴과 성격으로 태어났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이른바 자기 창조 능력은 한계에 부딪힌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지 않은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자유로워질 수 있고, 가능성을 시도해볼 수 있는 삶 속에서 "우연에 의해 존재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이나 영웅주의에 기대지 않고, 우리 내면의 힘을 기르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 곧 탄생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탄생성이란 늙음이나 젊음에 좌우되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비루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하면서 자기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일을 벌이는 것도, 활동량을 늘리는 것도 아닌 언제나 변함없이 냉혹하게 우리를 짓누르는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잃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는 것이다. 겸허하게, 그러나 예상치 못한 것과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다시 한 번 세상에 충격과 감동을 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고백하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뜻밖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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