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시대의 인사들을 생각할 때 난 겸허해진다. 끝까지 굳히지 않고 투쟁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만 아니라, '변절자'들을 생각할 때도. 지금 나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곳에 살고 있는 까닭에 유리한 입장에 서서 그들을 마음껏 도마 위에 올린다. 그러나 나에게 그럴 자격이 과연 있는가. 난 어떤 고문도-손톱이 빠져나가는 고통도, 코 속에 고춧가루를 탄 물이 들어가는 고통도, 눈에 들이미어진 전등불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고통도-겪어본 적 없다. 처자식이 굶주리는 괴로움과 모든 일을 감시당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고난도 겪어본 적 없다. 무엇보다 난 한번도 '절망'을 겪어본 적 없다. 30년이 넘도록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서, 압제를 벗어날 길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나치 독일이 유럽을 점령하고, 일제는 아시아 일대를 차지하고 이들에 대항할 세력은 보이지 않을 때) 나는 과연 계속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 시기에 한국의 많은 문인들은 변절하고 일제에 협력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길을 잃고, 일제와 동화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를 택했다.
난 자신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기에 변절자들을 비난하는 데 부담감을 느낀다. 물론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쉽게 비난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안락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아 고난을 논하기는 얼마나 쉽고, 어떤 핍박도 고문도 겪지 않고 정의와 진리를 입에 담는 것은 또 얼마나 가벼운가. 치기어린 어린 시절과 다르게 요즘 나는 '변절'을 생각할 때 나는 분노와 비난보다 '저항'의 어려움을 되새기게 되고, 희망이 없는 시기에 절망에 굴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그렇다, "패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고귀한 영혼을 지닌 자들만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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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읽다가 든 잡생각이었고.
<절망은 죽었다> 프랑스의 저항문학가 베르코스는 이런 제목의 서문으로 소설집의 문을 연다. 그는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일련의 소설들을 썼단다. 그리고 저항 문학의 대표로 불린다고. 그는 암담한 현실이지만, '절망은 죽었다'고 활기차게 선언하고 지하로 유통되는 소설을 써나간다. 그렇지만 '저항 문학'이라는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르게, 오버하지 않고 담담하게, 나치 독일 치하의 프랑스인들이 겪는 심적 고통과 갈등, 부끄러움 등을 선명하게 담아냈다.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독일에게 패해 점령당했다는 것보다도, 친독일 정부인 비시 정부가 세워져 나치 독일과 협력하고 인종주의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소설집에서도 <별을 향한 행진>의 주인공 토마는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자유, 평등, 박애'의 국가 프랑스가, 유대 출신인 자신을 처형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이 불의한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당시의 양심적인 프랑스인들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였던 듯하고, 베르코스의 소설들에는 그런 부끄러움이 담겨 있다(<별을 향한 행진>, <베르됭 인쇄소>)
「그래도 참 안타까워…….」
「뭐가?」
「당신처럼 좋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게.」
「누구한테?」
「위선자들한테. 특히, 내가 이 아름다운 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우두머리 위선자한테. 이건 드물게 아름다운 순간, 어쩌면 마지막 아름다운 순간이 될지도 몰라.」
--<베르됭 인쇄소>
나아가 그런 부끄러움은 프랑스인을 넘어 '인류'로서의 부끄러움으로 확장된다. 죄없는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현실에서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냐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고 묻는 <무기력>과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얄팍한 동정이나 던진 채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꿈>이 그런 작품들이다.
인간이란 게 뭐냐고? 가장 더러운 피조물! 가장 비열하고, 가장 음험하고, 가장 잔인한! 호랑이? 악어? 그것들은 우리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어! 게다가 그들은 결코 성인인 척, 사상가인 척, 철학자인 척, 시인인 척 하지 않아! 그런데 이따위 것들을 내 책장에 꽂아 두고 간직하라고? 뭐하게? 저들이 성당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저녁마다 불가에 앉아 스탕달 씨, 보들레르 씨, 지드 씨, 발레리 씨와 우아하게 대화나 나누기 위해? 지구의 모든 표면에서 저들이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도끼로 여자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동안? 질식시켜 죽이기 위해 일부러 방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는 동안? 라디오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처에서 교수형 당한 시체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동안? 친구들의 이름을 불게 하려고 저들이 사람들의 손발을 불로 지지는 동안?
--<무기력>에서
거짓된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간 인간들과 그런 이데올로기로도 결코 왜곡될 수 없는 인간의 선한 감정을 담은 작품도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신성한 결합이라는(일제의 내선일체 주장을 연상시켰다) 아름답지만 거짓된 이데올로기에 속아 프랑스에 왔지만 진실 알고 괴로워하는 독일 장교의 이야기를 다룬 <바다의 침묵>, 애국주의에 사로잡혀 정부의 정책을 굳게 믿다가 배신당하고 유대인 친구를 위해 반정부 활동을 시작하는 인쇄소 사장의 이야기를 담은 <베르됭 인쇄소>. 개인적으로는 <베르됭 인쇄소>가 제일 재밌었다.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소설들이었고, 또 번역자의 해설도 좋았다. 베르코스는 전후에는 독일에 부역한 문학인들을 처벌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역시 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그런 부역자 처벌이 한국에서는 이루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베르코스를 비롯한 프랑스인들은 '고작' 5~6년밖에 지배를 경험하지 않았다. 우리도 겨우 그 정도의 지배만을 겪었다면 일제에 협력한 지식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려 36년의 지배를 겪었고 의지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기야 이런 걸 따지는 것도 좀 우습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감내해야 했을 고난과 절망은 조선의 지식인들의 것보다 더 적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역사의 죄과와는 별개로, 그들이 겪어야 했을 고뇌를 생각하는 것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일 것 같다. 물론 일제에 부역한 것도 모자라 독재에도 협력한 서정주 같은 답이 안 나오는 인간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