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불렀기에 낯설지 않은 존재의 이름이 구체적인 발음과 형태를 띠고 혀끝에서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이 유용한 도우미를 가족 비슷하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P26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P29
"무엇이 좋은지 모르기 때문에 손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검색 결과로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 즉 남성들이 자신의 사회적관계나 생물학적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아저씨보다는 오빠를선호하는 비율이 높다고 나옵니다."- P33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P51
수많은 유추 행위를 통해, 주인이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이라도 상황을 통한 짐작으로 종합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에 따라 늘어나는 경험과 지식의 질량은 그에게 필요치않은 무거운 털외투처럼 나날이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 외투를벗고 가벼워져야 한다는 판단만은 들지 않는다.- P141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 그 우주 안의 콩알만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P184
시간적 재정적으로 유여한 중산층 이상의 이들이나 유언장 같은 걸 작성하고 재산 분배를 지시하며 변호인의 공증을 받을까, 웬만한 장년층은 그날 하루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해 살아낼 수밖에 없으며 오늘도이렇게 지나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태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적어도 명정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자신의 삶 마지막의 모습에 별도의 주석을 달지 못했었다.-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