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이야기 하는 아사히 맥주

하루 자고 첫날.

상하이 지도를 쫙 펼쳐 놓고 가고 싶은 곳을 표시했을때 가장 밀집 되어 있는 곳이 남쪽의 프랑스 조계지 였다.

상하이는 크게 남서 쪽 프랑스 조계지, 북쪽 일본 조계지, 동쪽 영국 조계지, 그 사이 각국 공동조계지, 그외로 나뉘어 진다.

우리의 답사 일정도 그렇게 짜였다. 애초에는. 하지만 오후가 되면 돌발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길바닥에 시간을 쏟아 붇고, 결국 다 보지 못하고 다시 그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가장 일정을 잘 지킨 날이 이 날과 마지막 날이 아닐까.

일찌감치 호텔 식을 먹고(호텔 식은 숙박비에 포함된 것으로 20위안 짜리인데 볶음밥도 나오고, 죽도 괞찮고, 뭐 그런데로 먹을 만 했다. 하지만 이것도 7일 연짱 똑 같은 메뉴로 먹기엔 힘겨웠다. 메뉴의 변화가 전혀 없고 우리가 결국 먹는 것도 항상 볶음밥에 죽이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자 다시 인민광장으로 갔다.


7일동안 매일 먹은 볶음밥과 죽

우리가 머문 숙소는 난징 동루에 자리 잡고 있어 인민광장과 매우 가까웠다.

인민광장은 지하철이 4개나 지나가는 중심지라 교통은 편리한데 인간들이 무지 많았다.

서울의 지옥철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리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았다.


미어터지는 인파들

지하철은 거의 1분 간격으로 왔다. 그리곤 매번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집어 삼키고 사라졌다.

대중교통 수단 이용하면서 느낀 중국인에 대한 판단(!)

첫째, 중국사람들 줄 잘 안선다. 우리가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웬 사람들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있다. 소위 새치기. 항상 조심하지만 엉겁결에 새치기 당한다.

둘째, 교통 질서도 무지 안지킨다. 파란불에 건너는데 한창 파란불인데 멀쩡히 건너는 우리앞으로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어의없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빨간불에 막 지나간다. 우리도 마지막날엔 8차선을 무단횡단했다.

세째, 중국 사람들 아니 상하이 사람들의 특징. 진짜 걷는것 싫어하여 절대 계단 이용 안한다. 미어터져도 에스칼레이터를 탄다. 그래서 에스칼레이터 쪽의 승강장은 더 뽁짝 거린다.

 쉬자후이 성당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 중심지 쪽으로 훑으면서 동선을 잡았다.


쉬자후이 성당

지하철에서 내려 묻고 걸어 제법 쉽게 찾아 간 곳.

그런데 문이 꽁꽁 잠겨 있다. 분위기가 웬지 안좋았다.

안내문을 보니 오후 1시부터 내부를 개방한단다. 현재시간 오전10시쯤. 이일을어쩐다.

문옆에 수위실 비슷한 곳이 있어 사정을 했다.

여권을 달래서 보여줬더니 별로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볼줄도 모르는 듯.

어쨋든 문을 열어준다. 특별히 외국인의 방문을 가상히 여긴 듯.

단 사진을 찍지 말랜다. 안찍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들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감사.

1896년 건립된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란다.

이런 뾰족 탑, 뾰족 지붕을 고딕 양식이라 배웠지.

이 지역이 서광계라는 사람의 후손들이 정착해서 살아서 서가장(쉬자후이)이라는 지명을 가졌다.

서광계는 중국의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데 마테오리치의 영향으로 개종했고, 이후 그의 천주실의 집필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란다. 이곳에 이런 성당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중국 공산화 이후 반 종교정책에도 꿋꿋하던 이 성당도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에게 파괴되어 첨탑이 날라갔단다.

지금 것은  1982년 중국 정부가 복원. 지금의 성당 체계도 교황청과 무관한 공산당이 임명하는 주교가 관장하는 애국교회란다.

난 못 봤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의 무대였단다.

내부로 들어가니 어느 성당, 교회, 절과 마찬가지로 장엄하고 엄숙하고 정갈한 것이 모든 종교는 그 계통이나 체계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 같더라.

스텐드 글래스며 신기한 그림들이 있더만 사진 안찍겠다는 약속때문에 아쉬워 하다 남자 2명이 들어와 사진찍길래 우리도 살짝 살짝 셔터를 눌렀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그림과 한자 설명글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를 그림


성당 내부 모습


문화 혁명때 잘려나간 첨탑

스텐드 글래스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상징하는 문양을 보면 마치 상해 박물관 청동기의 문양과도 느낌이 비슷했고, 또 예수의 생애를 4자한자로 압축해 놓은 것 해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맡겨놓은 여권을 찾아 들고 송경영 고가를 찾아 갔다.

지도상으로 한 두 블럭쯤으로 나와 있어 걸었다.

지도의 거리명과 실제 길의 거리명을 맞춰가며 걸었다.

한 시간정도. 뭐 아직은 초장이니 그 정도 걷는 것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것 저것 거리 구경도 재미있고. 하지만 이런 보행들이 골병의 시작인 줄 이땐 몰랐다.


지나다 들른 화랑
 

이 주변도 제법 옛 건물들이 많았다. 생긴게 심상치 않아 들어갔더니 화랑이었다. 내친김에 그림들도 구경하고.

 
소위 식민지형 테라스 건물

서양 국가들이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면서 더위를 이기기 위해 만든 테라스 건물들. 근데 이런 건물들이 갑자기 만국 공동 식민지역에 등장한다. 별로 덥지도, 테라스도 필요없는 지역들에.


길거리 공중 화장실 - 상급이다.


상하이 주거 특징 룽탕 모습


고층 아파트

전통적 영세 룽탕이나 고층 아파트나 공통적인 것은 상하이 집들은 빨래를 밖으로 너는 것이다. 빨래대를 밖으로 내어 놓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듯. 온통 휘날리는 이불, 빨래들. 떨어지지는 않는지.

걷고 또 걸어 겨우 송경령 고가에 도착했다.


송경령 고가 입구

입구가 권위적이고 들어서면 공안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으로 이미 이 고가의 무게감을 느낄수 있다.



송경령 동상과 기념관

19세기 말 격동기의 중국을 살았던 송씨 집안의 세딸 중 둘째. 송경령.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2천5백년 황제 국가를 무너트리고 공화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 손문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 손문의 뒤를 이어 국민당을 이끌고 급기야 대만으로 도망한 장제스와 결혼한 세째 송미령.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세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면 둘째는 조국을 사랑했다라는 말도 있다.

대부호의 딸로 태어나 미국 유학까지 한 젊고 매력적인 신여성 송경령은 26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아버지 친구 였던 손문과 결혼했다. 11년간의 결혼 생활 뿐이었지만 둘은 지극히 사랑했고, 정치적인 동지였던 것 같다.

손문이 죽고 난 후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혁명가로서 당당히 홀로 걸어갔다.

국민당 대신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고, 이후 중국의 세찬 역사에 줄곧 국모로 존재했다.

집안 곳곳에 사회주의 국가 원수들과의 사진과 선물들이 그득하다.

모택동의 각별한 관심도 사진이나 물건들에서 느껴진다.

찍은 줄 알았는데 없는 사진. 식당에 걸려 있던 춘향전 자수는 김일성이 준 선물이란다.

송경영 고가의 뒷편

1981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이 저택에서 오히려 난 검소함이 느껴졌다.

그 어떤 사심없이 오직 자기 조국을 위해 한몸 바친 숭고한 여성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성황후에게 '조선의 국모'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국모'라는 이름은 아무데나 붙이는게 아닌것 같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2시간 남짓 끊임없이 중국 젊은이들이 가이드와 함께 다녀갔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여전한 것같다.

다시 손중산 고거로 가야 했다.

좀전에 너무 걸어서 이번엔 버스를 꼭 타려 맘먹었다.

이래저래 버스를 타고 걷고 해서 도착했다.


손중산 고거 입구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 그 호가 중산이다. 손문이나 나중에 노신이나 지식인이요 의학도 였으나 조국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대만의 중화민국정부와 중국 중화인민정부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인물.

이곳은 1918년에서 24년까지 살던 곳으로 손문을 지지하던 캐나다 출신 화교가 기증한 3층 양옥집이다.


손중산 기념관과 고거

기념관옆에 그의 침실, 주방, 사랑방이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입장권을 회수해갔다. 기념으로 아무리 달래도 안주더군.

사진도 내부는 못찍게 하는 통에 껍데기 사진만 있다.

공안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릴 감시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보통 cctv를 설치하는데 여긴 인력이 싸니깐 그냥 사람을 고용해서 관리 하나 보다.

그것도 괞찮네. 한번씩 묻기도 하고.

한참 구경하다 이상한 것 발견. 아니 이럴수가.

송경령 고가와 달리 손문의 집에서는 책이 참 많았다. 그것도 역사서가.

역시 지식인이라 사서를 많이 읽었나 보다. 했지.

곳곳에 책장과 책들. 그 책들을 자세히 보니 진짜 책이 아니고 꼭 책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그런데 그 사진이 얼핏 보면 책을 넣은 듯 했다.

우리나 되니까 알아내지 원.


손중산 동상

잠시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다시 주은래 고거를 찾아 떠났다.


산뜻한 옛 집들


길거리 청소 차량- 눈올땐 눈도 치우더만


깨끗하고 반듯한 거리 프랑스 조계지

한 300m쯤 갔나 곧 찾을 수 있었다.


주공관

일본 패망 직후 1946년 중국 공산당 상하이 지부가 있던 곳으로 겉으로 공존을 표방했지만 속으로 갈등을 빚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당시 국민당의 점령지 였던 상하이에서 두 세력모두에게 존경받던 주은래의 이름을 빌어 공산당은 활동할수 밖에 없었다.

침실에는 당시 공산당원들이 사용하던 도미토리 침대가 놓여있었고, 앞서 두 고거에 비해 매우 규모도 작고, 시설도 열악한 것이 역력하였다.

이곳을 보니 조국의 해방에 도움이 될까 이웃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에 몸을 담고 탄압을 피해 활동했을 우리 조상들이 생각이 나 코끝이 시큰 했다.


주은래 동상



중국 공산당 상하이 지부

좀 약하게 보고 다시 근처에 있다는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나섰다.

이번엔 걸었다. 길 안내가 부실하여 버스를 이용하기 힘들었고, 택시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 30분쯤 걷고 걸어 저 멀리 한국어 간판이 보였다.

유난히 낡은 거리느낌. 좀전의 깨끗한 프랑스 조계지와 사뭇 다른 뒷골목 풍경. 이곳에 임정이 거처했구나.


말리는 물고기류


말리는 육류들


한국어 간판들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


임시정부가 세들어 살던 마장로 36 룽탕


임정 청사 복원 기념비

우리 교과서에 나왔던 그곳은 허물어 지고, 이곳의 임정청사와 충칭, 가흥지역에 임정이 남아있단다. 유난히 낡은 거리라 재개발 대상으로 허물어 질 지경이었으나 본국의 여론이 들끓어 우리 정부가 겨우 보존하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별 볼거리는 없고, 사진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어 가이드가 있었으나 참으로 빈약한 설명으로 전혀 도움이 되질 못하고, 사람들은 바글바글거렸다.

내부는 대부분 재현된 것일텐데도 절대 사진못찍게 했다.

이곳에 덧신 나르는 일을 하는 한 아줌마 - 한국인에게 끊임없이 사진찍지 말라고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 한국인을 무지 싫어 할 것 같은, 한국인도 이 아줌마를 무지 싫어 할것 같은 사람이 있더군.

난 뭐 사진 안찍었지만 주변에 망 봐주면서 몇 컷씩 숨바꼭질 하며 찍기도.


하루 800여명 한국인이 북적이는 곳

단체로 직장에서 온 사람들. 거의 한국인들만 오는 유적지.

비록 임정이 이곳에서 겨우 몸이나 보전하고, 실제 독립운동을 지도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뜻이 조국의 독립에 있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또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가며(바로 앞에 경찰서가 있었다 한다) 뜻을 도모하려 했다는 곳에 직접 와 보니 감정이 북받치기도 하여 눈물이 남(난 원래 감정적이니까)

다시 어두워 지는 거리속으로 중국 공산당 일대회지로 간다.

거의 문 닫을 시간이라 서둘렀다.

임정 건물 찾는데는 무척 애를 먹었다. 간판이 별로 없어서.

근데 자기들에게 중요하다는 일대회지는 정말 대문짝 만하게 곳곳에 간판이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닫을 시간이라 칼같은 공안들이 출입을 막았다.

그저 밖에서 스쿠먼 구조라는 철문 형식의 건물만 봤다.

중국 공산당이 1921년 7월 23일 제 1차 전당대회를 열었던 곳으로 중국 공산당에게 불멸의 성지와 같단다.

당시 중국 전역의 공산당원이 57명. 그 가운데 각 지역 대표가 13명이 참가했다. 당시 20세 였던 모택동도 호남성 대표로 여기에 참여.

거의 모의수준인 이 전당대회도 프랑스 경찰의 개입으로 저장 성 지아싱 호수에 배 띄우고 마지막 회의를 했다나.

속을 안들여다 보니 기억도 약하다.


중국 일대회지

결국 신천지까지 왔다.  최근 놀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 답게 기념품들도 럭셔리 하고, 음식점 쇼핑센터가 완벽했다.

오늘 하루 너무 열심히 돌아다닌다고 밥도 못먹고, 물도 한모금 못먹고, 잠시 잠시 다리쉼도 못했으므로 좋은 음식점에 들러 밥먹기로 했다.


이 일대의 가장 놀기 좋은 곳 신천지


그래서 찾은 식당, '정태풍' 깔끔한 인테리어, 수많은 종업원들이 대기중(중국의 일반적 무시분위기와 사뭇 다름). 배고픈 김에 둘이서 3가지를 시켰다.

맛도 좋았다. 좋을 수 밖에. 이날 먹은 이 음식이 8일동안 있으면서 먹었던 그 어떤 것 보다 맛있고, 비싼 음식이었다. 초장에 이런 걸 먹었으므로 난 중국 음식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괞찮군. 이렇게 뿌듯할 수가, 잘 다니고, 많이 보고, 밥도 만족스럽고.


중국 물만두


볶음밥


중국 국수

하지만 점점 몸이 지쳐가는 듯.

밥먹고 바로 숙소로 들지 않았다.

밤이 되고 나서 숙소 주변의 상가 구경, 장보기, 커피점에서 이것 저것 .

이후의 일정들로 밤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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