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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운다’는 책 이름은 지난 겨울의 사진 한 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군기지 확장 반대’ 붉은 머리띠를 맨 늙은 농부의 주름이 깊이 파인 얼굴, 괴로운 듯 눈감은 채 고개 숙인 얼굴 쪽으로 손을 가져가 고통스럽게 눈물을 막는, 지금은 돌아가신 이 노인의 뒤로는 잡풀 넝쿨과 미군부대의 철조망이 눈물 젖은 시야처럼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경작지를 엔클로저 당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심정을 이처럼 무섭게 보여주는 사진도 드물 것이다. 바로 그 ‘무서움’이 독자에게 줄 수도 있는 부담 때문에 ‘들이 운다’ 표지 사진은 사진가 노순택씨가 찍은 또 다른 사진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또 다른 사진에서도 들녘과 미군부대를 빠른 속도로 뒤덮고 있는 먹구름을 강조한 원본의 이미지는 삭제된 것 같다.


그런 이유를 떠나서라도 우리는 이 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27편의 인터뷰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인터뷰들은 편집자에 의한 가공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택과 충남의 방언이 섞여 만들어낸 독특한 운율과 억양의 사투리, 끝날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방식과 내용들, 중언부언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독특한 수사법 들이 독자들을 멈칫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채록은 행간을 읽는 진지한 독자들을 위한 의도임에 분명하다.


‘들이 운다’는 2003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직후 결성된 반전 클럽인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이 2005년 3월부터 10월까지 팽성읍 대추리, 도두2리 주민 28명과 가진 인터뷰 27편을 모은 책이다. 2005년 3월은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국방부가 물건조사를 벌이던 시기이자 평화바람이 대추리에 터를 잡은 지 한 달이 지난 시기다. 평화바람은 지금도 대추리에서 활동중이다.

 

편자들은 '평화바람'이 책을 쓰는 단체가 아니며, 이 책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팽성 농민들의 삶과 소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인터뷰어들은 주민들을 만나가면서 스스로 변화를 겪었다고 고백한다. <엮은이들의 뒷이야기>에서 한 인터뷰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희희낙락하고 있다가도 인터뷰 나가면 사람들이 다 우울해져가지고 왔어요. 예를 들어서 그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니고, 가난하게 살아오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서 자기 삶이 뿌리 채 뽑혀질 거라는 전제가 항상, 우리도 있었고 그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맨날 슬펐고 그것이 지금 우리의 생활을 굉장히 많이 좌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의 출판 기자회견은 용산 국방부 앞에서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땅만 파먹고 살게 놔둬요."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 윤광웅 국방부장관 들에게 보낼 <들이 운다> 한 권씩도 준비해왔다. 책 속에서 "이거 해가면 대통령한테 들어가는겨?" 하고 인터뷰어에게 확인하는 팔순 할머니의 질문에서 느껴지듯, 늙은 농민들은 <고생고생하며 살아와 인생의 말년에 삶의 터전에서 뿌리뽑히지 않고 '이대로' 살다가 '여기서' 죽고 싶다는 우리의 '단 하나' 소원>을 위정자라면 외면할 수 없을 거란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농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비웃듯이 강제수용과 강제철거라는 마수가 점점 더 이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의 편자들은 "마을 공동체의 유대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고 <서문>에서 지적했다. 이 책 곳곳에서 그러한 찢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 정부(국방부)의 협의매수는 그저 349만평 드넓은 땅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돈의 유혹에 굴복해 타락한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배반하기 시작했다. 마을주민들은 집단적인 불면증과 수면제 복용, 불안 증세 들을 호소한다. <들이 운다>를 위한 인터뷰가 이루어지기 직전인 1년 전 겨울, 대추리에서는 유례없이 석달 사이에 보름에 한 사람씩 생을 마감했다. 농민들은 이를 두고 "정부가 죽였다. 간접살인이다." 하고 한결같이 말했다.

 

살아있음으로써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다. 늙도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민들 중 일부에게 위기는 파국을 가져왔다. 농촌에 정박당한 노인들은 남이나 다름없이 갈라져살던 자식들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기 시작했다. 아들 자식들은 "그냥 여기를 떠나서 살자"고 노인(들)을 설득했다. 늙은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땅은 묻혀있으니까 자식들이 파가지는 못할 거 아녀." 보상금은 갖가지 부채, 그리고 자식들의 도시생활을 위한 소비재(자동차)를 구매하는 데 쓰인다. 자식에게 배신당해 버려진 노인들은 국방부가 매입해간 빈집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것이 협의매수의 진정한 의미다.

 

왜, 끈질긴 보상의 유혹과 공권력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땅을 지키려고 처절하게 투쟁하는가?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미군기지 확장 계획이 발표된 뒤로 이 곳 작은 마을들에, 가족들에, 개인들 속에 어떤 멍이 들었는가? 이 곳 농민들의 진정한 바람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농민들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그리고 싸움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농민들의 울음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60후반 대추리 '청년들'의 개방적인 인간미와 유머가 읽는이에게 따뜻한 위안을 준다. 정부와 미국이라는 너무나 거대한 힘에 짓눌리면서도 "내 손으로 땅을 일궈 살아왔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자존심은 감동을 준다.

 

또한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굶주림의 시대를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생산하는 삶/생활"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이 책에 실린 27편의 인터뷰 가운데 여러 편이 먹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먹는 이야기로 끝나는데,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목숨을 이어간다는 의미다.

 

이 책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 다양한 두께의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인터뷰들 속으로 일단 들어가게 되면 누구나 울지 않을 수 없고 웃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소망한다. 마침내 들이 웃는 소리 울려퍼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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