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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유진님의 서재
  • 밸러리
  • 사라 스트리스베리
  • 15,750원 (10%870)
  • 2023-12-07
  • : 273
호기심이었다. 한국문학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실존했던 어떤 여성을 허구를 통해 서술해 보려는 시도들. 북유럽 작가가 미국의 한 여성을 어떻게 상상하고 서술하는지 궁금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읽는 동안 계속 고통스러웠다.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폭력들 속에서 밸러리라는 여성의 삶을 상상해보려는 이 글은 상당히 파편화되어 있고 난삽하다. 하지만 애초에 한 사람을 혹은 하나의 삶을, 하나의 세계를 물 흐르듯 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보아온 수많은 한국문학 속 여성들의 언어처럼 밸러리 또한 기존의 근대적인 남성 문법과 언어로는 세울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유년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밸러리는 끝까지 솔레너스라는 성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 여성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성이라는 목줄을 차게 되는데, 그 목줄을 영원히 아버지의 손에 맡길지 그 목줄을 채가서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고 살아갈지 선택하게 된다. 목줄을 끊어버리는 그런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일보다 스스로 움켜쥐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어떤 점에서 밸러리의 선택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타자들만을 사랑했던 밸러리. 앤디 워홀을 쏘아버리고 국가에 의해 광기와 질병으로 규정되었던 많은 여성들 중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밸러리. 폭력 속에서 밸러리가 자신과 같거나 다른 타자들을 사랑하는 대목들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정의로웠다. 밸러리는 정의를 미워했고 거부했는데 이상하게도 밸러리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정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밸러리는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한때는 배움과 노력으로 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고 꿈을 키웠다. 그 점이 가장 서글프다.​




마음과 영혼과 머리는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대목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 믿음은 너무나 약하지만 가장 강했다.



이 소설은 허구일 뿐이고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여성을 써내려가는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허구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가능한 복원, 한 여성에게 닿으려는 어떤 복원이기도 하다고 믿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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