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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유진님의 서재
  • 스노볼 (양장)
  • 박소영
  • 13,320원 (10%740)
  • 2020-10-23
  • :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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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현재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최근 공포 콘텐츠의 단골 소재였던 좀비가 나타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2020년, 우리는 먼 미래의 재난으로 상상하던 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미래의 길목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파괴된 환경과 일상에 자리 잡은 디지털 폭력이라는 인재(人災)는 펜데믹과 이상기후, 그리고 우울과 자살, 범죄의 형태로 우리에게 무너진 환경과 무너진 인간성이 먼 미래가 아님을 일깨운다.

그런 의미에서 『스노볼』은 환경과 인간성이 무너진 미래가 정말로 도래해버린 후의 세계에 대한 명랑하고도 창백한 상상적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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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은 재난에 가까운 기후변화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트루먼쇼처럼 문명의 삶을 리얼리티 쇼로 연기하는 연기자와, 그 삶을 연출하는 감독, 소비하는 노동자로 위계화된 세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기이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연기자들의 자각된 트루먼쇼의 공간은 유일하게 얼어붙지 않은 땅인 '스노볼'이다. 원래 스노볼은 눈 덮인 작은 세계를 감싼 구체 장식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추위가 없는 세계를 품은 반구 형태의 도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반전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역설적으로 상기시킨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연기자로 뽑히거나 특수한 전문직이 되지 못하면 스노볼에서 살아가는 연기자의 삶을 관람하고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물질문명의 삶을 대리 경험하는 시청자가 되며, 그 방송을 시청하기 위한 전기를 생산하는 자전거의 생체 동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인공인 전초밤 역시 그런 노동자이며, 스노볼에서 태어나 가장 인기 있는 연기자로 평생을 살아온 동갑내기 연기자이자 초밤과 너무나 닮은 외모의 고해리의 삶을 대리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초밤의 꿈은 연기자가 아닌 감독이 되는 것이다. 평생 동경해온 고해리의 삶을 연출할 수 있는 그런 디렉터. 그러나 초밤에게 먼저 주어진 기회는 디렉터가 아닌 연기자, 그것도 연기자를 연기하는 일이다. 방송을 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고해리를 대신하여 스노볼에서 모두를 속여 달라는 이상한 제안. 그렇게 초밤은 누구도 할 수 없는 독특한 방송을 만드는 대체 불가능한 디렉터가 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삶을 잠시 경험하게 된다.

과연 해리와 초밤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초밤이 동경해온 디렉터 차설과 이 미래 세계의 사회의 정점이자 예외로 존재하는 기업 이본의 비밀은 무엇인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스노볼』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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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추위와 사적인 일상이 소멸되고 모든 인간이 도구화되어버린 세계는 상황 자체는 달라도 낯설지는 않다.

안온한 삶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에서 기계적으로 일하다가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곳. 사생활을 걸고 물질적 풍요를 거래하는 연예인이나 명사들의 삶을 방송과 인터넷으로 접하면서 관음 하듯 소비하고 그들이 광고하는 비싼 물건들을 한 번씩 주문해서 소비하는 대리만족과 모방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삶. 모두가 감시당하고 일상이 노출된 채 사생활과 인권을 잃어버리는 삶. 그런 방송을 좌지우지하는 디렉터가 스노볼의 삶을 통제하고 연기자들의 인권마저 틀어쥐고 있고 그 배후에 있는 혈통으로 경영권이 상속되는 대기업 이본의 무한한 권력까지.

『스노볼』이 그린 미래 세계가 야기하는 가장 큰 공포는 지금 우리 삶을 극단적으로 보면 소설 속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거대한 트루먼쇼는 그 잔인함의 문학적 형상화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 초밤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꿈을 꾸고 있다. 보여지는 삶과 기계적인 삶, 그리고 연출하는 삶. 초밤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보여지는 삶도 기계적인 삶도 아닌 연출하는 삶을 꿈꾼다. 디렉터가 되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

자기만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 단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그러나 그런 삶은 과연 가능할까? 잔인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타인을 믿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스노볼』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해보기를 추천한다.



** 약간의 아쉬움 :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거울과 그 거울을 통해 초밤이 목격한 것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내용만이 드러나 있는데, 목격된 것의 비중을 생각하면 보다 구체화된 설정이 서술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의미에서 열려있다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작품의 성격상 더 드러났어야 하는 설정들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암시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점이 다소 아쉽다. 스포일러를 제외한 서평을 작성하고자 하였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되면 쓸 수 있기를.


*** 본 서평은 『스노볼』 사전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창비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네이버 블로그에 동일한 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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