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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님의 서재
  • 생명을 보는 눈
  • 조병범
  • 12,600원 (10%700)
  • 2022-02-17
  • : 117

내 눈은 지금 무엇을 보는가

- <생명을 보는 눈>을 읽고

 

어떤 책이든 처음 손에 들면 표지 다음으로 차례 부분을 펼친다. 그리고 가만 소리 내어 읽어본다. 책을 쓴 이와 손잡고 낯선 길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마음 같은 거다. 전체 지도를 보고 안내받는 느낌이라기보다, 내가 멈춰서야 할 바위, 돌아야 할 모퉁이가 어디인가 미리 귓속말로 전해 듣는 기분이랄까.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다시 차례를 소리 내어 읽으며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 책은 끝났지만, 책 너머의 삶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지금 내 눈앞의 책 한 권 덕분에, 살면서 멈추거나 돌아가야 할 모퉁이들이 더 생긴 기분이다. 책 든 손이 든든하다.

손가락으로 모퉁이를 그리며, <생명을 보는 눈> 차례를 따라간다.

 

생명을 보는 눈 되기, 이름은 시선을 담는다, 계절보다 빠르게 오가다, 터를 잡고 살다, 이른 봄까지 머물다, 새도 주로 말하고 노래하고 드물게 운다, 사람 가까이에 살다, 사라질 위기에 처해 더욱 귀하다, 여름 물가에서 만나다, 작은 날개에 큰 하늘이 가득하다, 가을을 물고 오다, 숲을 살리다, 새가 날아드는 곳에 생명이 있다, 나는 왜 새를 보는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차례로 돌아가 뒤에서부터 되짚는다. ‘나는 왜 새를 보는가’, ……, 왜냐하면, ‘생명을 보는 눈 되기’. 생명을 보는 눈으로 새를 보자는, 새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책이 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글쓴이가 새를 보는 까닭은자기를 비롯한 생명을 보는 눈에 머무르기 위해서다. 미래가 암울한 세상 속에서 절망에 주저앉거나 체념하지 않고 생명을 보는 눈에 머무르기 위해, 글쓴이는 오늘도 새를 본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 이야기를 SNS에 올리고, 달마다 글쓰기 회보에 쓰고, 이렇게 책도 펴냈다.

 

지도를 보는 눈이 달리기이고, 풍경을 보는 눈이 걷기라면, 생명을 보는 눈은 멈춤입니다. (17쪽)

 

미친 듯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잠깐이라도 멈추려면 세상보다 더 치열하게 보고 써야 한다. 치열하게 멈추려는 글쓴이 덕분에 이제라도 더 자주, 더 오래 멈출 수 있겠다. 글쓴이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낯선 새 이야기 속으로 한 발 들어서 본다. 낯설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본디 그래야 할, 생명을 보는 눈길 위로.

 

글머리에서 글쓴이는 세상을 보는 눈을 세 가지 갈래로 나눈다. 지도를 보는 눈, 풍경을 보는 눈, 생명을 보는 눈이 그것이다. 먼저, 지도를 보는 눈은 껍데기만 바라보는 눈이다. 이 눈으로는 사실 뵈는 게 없다. 그래서 함부로 파헤치고 갈아엎을 수 있다.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이지만 다 안다고 착각하기 쉬운 거짓 눈이다. 여기서 조금 더 대상에 다가선 게, 풍경을 보는 눈이다. 하지만 이도 사랑 없이 멀찍이 서서 보는 눈일 뿐이다. 예쁘구나, 멋지구나, 감탄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눈에 가깝다. 하지만 생명을 보는 눈은 다르다. 속살을 보는 눈이다. 안 보이는 것을 보게 하고 내가 보는 것과 나를 하나 되게 하는 눈이다. 아프면 같이 아프고,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같이 울게 만드는 눈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 반 아이들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이 참 반가워하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생명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보려 늘 애쓰는 글쓴이와 아이들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여기 나도 있다고, 나도 당신과 꼭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고 서로 마주 보며 손짓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생명을 보는 눈이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며 세상을 채워나가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꽉 차오른다.

아이들과 글을 쓸 때나 그림을 그릴 때 ‘멈추어 오래 머물며 자세히 보아라.’ 말하는데, 이게 바로 ‘생명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한다. 현미경으로 보듯, 대상을 렌즈 아래 두고 낱낱이 보라는 말이 아니다. 마음을 바짝 들이대고 내가 보려는 것과 하나가 된 것처럼 온몸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조류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보다 더 자세하게, 더 깊게 생명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까치/ 5학년 변보경

 

학교 오는 길에

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를 봤다.

내가 보는 걸 느꼈는지

까치는 나를 슥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까치는 까악, 까악

울지 않았다.

까치는 동네 사람들 얼굴을

기억한다는데

진짜 내 얼굴을

알고 안 우는지

궁금했다. (22.3.31.)

 

 

죽은 새 /김라희

학교 가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딱 내려서

돌계단 쪽으로 가는데

갈색 날개와 하얀 배를 가진

새가 죽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22.10.24.)

 

 

까마귀 / 이도현

오늘 학교에 오는데

107동 쓰레기장에

까마귀가 주둥이로

페트병을 물고

116동 쪽으로 날라갔다.

나는

얼마나 배고프면

페트병을 가져가는지 생각했다. (22.5.17.)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아이들에게 새를 보라고 한 게 아니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일부러 애쓰지 않으면 우리가 본디 타고난, 생명을 보는 눈을 되찾기가 갈수록 힘들다. 아이들에게 참말 필요한 조기 교육은 아니, 언제 해도 적기인 교육은 생명을 보는 눈으로 살아가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며 까치 마음을 헤아리고, 죽은 새 앞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하고, 페트병 물고 날아가는 까마귀 배고픈 심정을 미루어 짐작해 보며 아이들은 둘레 생명들과 서로 따스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이들 시 속에서 새롭게 까치와 까마귀를 만났듯, 책을 읽는 내내 새로이 새들을 소개받는 기분이었다. 책 속의 황오리, 개리, 저어새, 도요, 기러기는 그냥 새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얀 황오리 곁에 늘 묵묵히 함께하는 주황빛 황오리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함께하는 황오리가 한 마리라도 있다면 낯선 땅 한겨울이라도 두려울 게 없을 것입니다. 곁은 지킨 황오리 덕분에 하얀 황오리는 돌곶이습지에 머물며 충분히 먹이를 먹은 뒤 떠났습니다. (39쪽)

 

절뚝, 절뚝, 불편할 텐데 개리는 쉬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 그렇지만 개리는, 다리 잘린 개리는, 한 달 동안 꿋꿋하게 버티며 스스로 먹이를 먹은 뒤 동료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60-61쪽)

 

두 마리가 떨어져 있을 때는 부리를 제각기 젓지만 가까워지면 어린새가 어미새를 쫓아다니며 먹이를 달라고 졸랐습니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동시에 부리를 쩍쩍 벌려 보챘습니다. 어미새는 어린새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거리를 뒀습니다. 거리가 멀어지자 어린새는 다시 부리를 물에 대고 저으며 스스로 먹이를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어미새가 가까이 있으면 쫓아다니며 먹이를 졸랐습니다. 어린새가 스스로 자라기를 바라는 어미새가 휙 멀리 날아갔습니다. 어린새가 어김없이 쫓아갔고요. (98-99쪽)

 

워낙 먼 거리를 날아야 하기 때문에 도요는 이동할 때가 되면 날기에 적합하게 변신합니다. 날 때 불필요한 다리 근육을 줄이고, 날 때 꼭 필요한 가슴 근육을 살찌웁니다. 며칠씩 하늘에 떠서 날아야 하므로 소화 기관 크기와 무게도 줄입니다. 몸 내부뿐만 아니라 깃털도 바꿉니다. 1년에 한 번씩 비행깃을 완전히 새것으로 갈고, 깃털 색깔을 두 번 바꿉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겨우 중간 기착지에 다다르면 도요새 몸은 반쪽이 됩니다. (118쪽)

 

앞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날개를 칠 때 바뀐 공기 흐름을 뒤따르는 기러기가 이용하면 힘이 덜 들어 오래 날 수 있습니다. 맨 앞에 나는 기러기가 힘이 빠지면 뒤로 물러나고 뒤에 있던 기러기가 앞에 나섭니다. 앞선 기러기가 우두머리가 아니고 그저 앞에서 조금 더 힘들게 날아갈 따름입니다. 지치면 뒤로 물러나고요. (127쪽)

 

묵묵히 곁을 지키는 ‘그’ 황오리고, 하나 남은 다리로도 꿋꿋이 버티는 ‘그’ 개리다. 어리광부리는 아가와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시키려는 ‘그’ 저어새들, 군더더기 없는 삶을 몸소 보여주는 ‘그’ 도요, 서로의 힘듦과 지침을 알아보며 서로를 채워가는 ‘그’ 기러기다. 글쓴이 따뜻하고 다정한 눈길 위를 거니는 ‘그’ 새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서 책장을 넘기는 내 손에 날개를 부비고, 부리를 갖다 댄다. 한결 친해진 기분에 나도 모르게 나를 빤히 바라보는 듯한, 사진 속 새들에게 손가락을 내민다. 생명을 보는 눈에서 동무를 보는 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가슴이 따뜻하다.

 

생명을 보는 눈으로 새를 보기 위해 수백, 수천 번 걸음을 멈추었을 글쓴이는, 책 끝머리에서 새를 향한 발걸음을 돌려 자기를 마주 보고 선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어 묻는다.

 

‘나는 왜 새를 보는가’

새를 보는 일은 결국 새를, 새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일입니다. 새의 전체를 온전하게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낮이든 밤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새를 보러 그렇게 다니는 까닭은 바로 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나이가 들고 어느덧 체력도 떨어져 꿈도 희미해지는 저의 맨 얼굴, 한때 정의를 부르짖고 사랑과 평화를 간구했지만 점점 초라해지는 저를 직시하려고요. 나와 나를 둘러싼 또 다른 나를 살펴보기, 멈춘 시간에 속하기, 비밀의 방에 머물기, 침묵하고 응시하기. …… 그래서 돌곶이습지에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두었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밤에 습지에 들었다가 아침에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습지를 떠나는 새처럼 제 자신이 새로워집니다. (172-173쪽)

 

새를 보는 일은 나를 보는 일과 같다는 글쓴이 말에 울컥한다. 생명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던가? 그 말이 참이다. 새가 그를 구하고, 그가 새를 구하며 서로를 거듭나게 해줬을, 책에 다 담지 못했을, 아프고도 아름다운 긴긴 나날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리다. 이 저릿함을 씨앗 삼아 내 마음에도 생명을 보는 새눈이 움트면 좋겠다.

저릿한 가슴 위에 가만 손을 얹고, 글쓴이가 들려준 이야기 속 ‘비밀의 방’ 앞에 선다. 이 방의 문을 열어줄 열쇠가 될 질문을 양손에 쥐고서 펼쳐본다.

 

지금, 어떤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나요?

이제, 어떤 눈으로 자연을 바라볼까요?

 

딸깍, 문이 열렸다. 설레는 맘으로 새 눈을 뜬다. (23.1.11.)

 

지도를 보는 눈이 달리기이고, 풍경을 보는 눈이 걷기라면, 생명을 보는 눈은 멈춤입니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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