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지난 겨울 내내 나는 100쪽 내의 짧은 분량의 이 책과 함께 보냈다. 오래 전에 사두었고 처음 30여쪽을 읽다가 쳐박아둔 책이었다. 마침 <천 개의 고원> 4장 언어학의 기본전제들을 읽고 뭔가 해제가 필요했던 터에 팟캐스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의 남자가 진행하는 이 내용은 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깊이도 모자란듯했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1월초 가족과 함께 보수동에 갔을 때 엄정식이 쓴 오래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구했기 때문에 좀 더 쉬우리라 생각했다.
엄정식이 쓴 책의 내용은 간단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은 그림이론이고 후기 철학은 게임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림이론은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고 언어는 세계와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의 명제는 항진명제로 의미를 가지 못하고 과학명제는 말해질 수 있고 철학적명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후기의 철학은 언어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가족유사성 정도를 가지는 집합과 같은 것이다. 각기 다른 언어에는 다른 종류의 게임처럼 유사성도 있지만 각각의 양식이 존재하고 언어는 그것에 따라 맥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단순히 보면 유클리드 기하와 비유클리드 기하의 차이와 비슷하다. 비유클리드 기하 전의 세계는 유클리드 기하의 공준에 의해 구축된 단일한 세계라면 비유클리드기하는 공준을 바꾼 세계는 존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기철학에서는 요소명제를 정하고 요소명제가 결합된 결합된 복합명제로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었지만 후기 철학에서는 하나의 단어(요소명재)는 본질적인 것이란 없으며 상이한 언어게임에 따라서 다양하게 맥락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엄정식이 쓴 이 내용을 아는 것이라면 이 논고를 읽는 것은 거의 헛수고에 가깝다. 하루에 한 두 페이지를 읽을 수 없는 날도 있었고 마인드맵을 하여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 겨울을 거의 헛수고를 한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평전을 구입하고 후기 철학인 쓰여진 철학탐구도 구입하고 영문판 논고도 구입했다. 그래서 뒷 부분은 영문판과 함께 읽었다. 영문판을 읽는 것은 일종의 암호풀이지만 더디 간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번역판 자체의 문장이 암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문장이 거의 단문으로 쓰여져 있기에 문장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평전에서 논고의 후기 부분을 찾아서 보니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쓰고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몹시 걱정한 부분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두 사람이 프레게와 러셀이었다. 그런데 프레게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고 러셀 역시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제대로 출판하고 싶었지만 출판사를 찾지 못하여 좌절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은 '수정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이 책이 단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다고 그래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면 한 편으로 다행인 생각은 든다. 논리학의 대가인 프레게나 러셀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내가 이렇게 끙끙거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이지만 한 편으로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단지 처음과 달라진 것은 장의 구분없이 숫자의 나열로 시작하는 문장이 처음에는 기가 질렸으나 이제는 친절한 안내로 보이고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문장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 다시 펼쳐 본 첫 구절 "세계는 일어나는 일의 모든 것이다"로 시작하는 문장이 무슨 예언서를 대하듯이 웅장해 보인다.
후기 철학을 다룬 '철학적 탐구'는 아주 두터운 책이다. 저것을 언제 읽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바쁘게 가지 않을 것이다. 일단 평전의 논고가 나오는 부분을 읽어 보고 철학일기를 읽고 영문판과 대조해 가며 다시 읽어 볼 것이다. 헛수고를 반복할지 모르나 내 문장이 깨끗해지기라도 하면 뭐 괜찮은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