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의 글
무료한 아침, 읽을 책을 찾다가 보르헤스를 떠올렸다.
버린 동전이 돌아오는 이야기 〈자히르〉를 읽으며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져 출구를 찾지 못했다. 다음은 〈신의 글〉이었다. 역시 보르헤스답게 상징들로 가득한 미로였지만, 이번에는 출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대리석을 깎아낸 듯한 단단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신의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강 작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흰〉의 서문에서 보르헤스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는 두 사람의 문체가 다르다고 생각했기에 의아했지만, 이번에는 보르헤스와 한강이 닮았다고 느꼈다. 보르헤스의 문장도 시적 함축성을 지닌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며, 문장마다 복합적인 상징을 새겨 넣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강은 섬세한 붓으로 내면의 고통을 그리는 반면, 보르헤스는 굵은 붓으로 지적 세계를 미로에 새겨 넣는다는 점이다.
보르헤스의 다른 작품처럼, 〈신의 글〉에도 뚜렷한 줄거리는 없다. 〈독일 레퀴엠〉처럼 감옥에 갇힌 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마야 문명의 사제 치나칸은 스페인 정복자에게 고문당한 후 감금된다. 그가 감옥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것과 먼지가 쌓이는 것 외에는 물리적 변화가 거의 없다. 〈독일 레퀴엠〉의 파시스트 죄수는 자기변명을 늘어놓지만, 치나칸은 깨달음의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은 보르헤스적인 미로 속에서 진리를 찾는 구도 소설로 읽힌다.
치나칸은 반구형 감옥 속에서 재규어와 함께 갇혀 있다. 감옥의 반구형 구조는 우주를 상징하며, 재규어는 신적인 존재 또는 자연에 숨겨진 비밀을 나타낸다. 그는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의 글에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신의 글은 세상의 끝을 예견한 신이 창조의 첫날, 불행을 피할 수 있도록 남겨둔 글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자연 속에 숨겨져 있으며, 오직 최후의 사제인 자신만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일 것이다.
치나칸은 재규어의 무늬를 관찰하며 답을 찾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모래의 꿈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을 경험하며 깨어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정오, 그는 갑자기 신의 글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태도와 과학적 사고
치나칸의 진리에 대한 태도는 특별하다.
그가 찾는 것은 태초에 신이 써두었다는 신의 글이다.
그는 신의 글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그는 물리학자들과 유사하다.
물리학자들은 모든 힘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치나칸은 경전을 읽거나 문헌을 탐구하지 않는다.
그는 내적 사유나 기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연 속에서 신의 글을 찾으려 한다.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 속 질서를 찾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치나칸은 가설과 검증을 통해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반복 속에서 직관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가 믿는 진리의 성격 또한 과학적 탐구와 닮아 있다.
그의 깨달음은 경이로운 경험이지만,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신의 글을 해독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초월적 경지에 도달한다.
그는 복수할 수도, 세계를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국가나 인간의 운명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
그의 깨달음은 내면에서 완결되었을 뿐, 바깥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을 향해 설법했지만, 치나칸은 감옥에서 잊혀진 채 죽어간다.
그는 미로를 빠져나왔지만, 그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완전한 무의미의 장소였다.
역사적 해석과 마야 문명의 기억
이 소설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
잊혀져가는 마야 문명을 기억하며, 정복자의 문명을 은근히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마야 문명의 사제였던 치나칸은 고문을 당하지만 보물의 위치를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적 상징인 재규어와 함께 감옥에 갇혀 결국 잊혀진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속에서, 마야 문명의 신화가 다시 떠오른다.
그는 나무로 만든 사람들이 물항아리에 공격당하고, 개들에게 찢기는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마야 신화에서, 신을 잊은 인간들이 결국 자신이 만든 도구에 의해 멸망하는 이야기다.
치나칸은 복수할 필요조차 잊었지만, 정복자들은 결국 그들이 만든 도구들에 의해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다. 정복당한 문명에겐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의 지혜는 막강해 보이는 정복문명의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남아메리카인들의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미로 속에서
보르헤스는 언제나 낯선 이야기로 우리의 사고를 흔들어 놓는다.
그는 마야 문명을 호출하여, 그의 마술 같은 문장으로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러나 이 초대는 당혹스럽다.
진리를 깨달았지만, 원리적으로 자신을 초월할 수밖에 없기에, 실상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신은 멸망할 세상을 만들었고, 진리는 결국 무의미를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할 의미가 있는가?
만약 세상이 거대한 미로라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큰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 속이 아니라, 옅거나 짙은 안개가 우리를 감싸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불확실성이 반드시 불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소행성과의 충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들이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가 존재한 이후로 가장 자유로운 세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누구도 아닌데, 왜 또 다른 사람의 움명에 관심을 갖고, 왜 또 다른 사람의 국가에 관심을 보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