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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을 읽고-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눈앞에 갑자기 바다가 펼쳐진 것처럼 놀랐다. 나에게도, 80년대를 지나왔던 우리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어깨를 걸고 노래 부를 때, 전국에서 모인 깃발이 입장할 때 우리는 가슴이 벅차올랐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런데 위의 문장은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 중에 나오는 것으로 승전을 구가할 때 나치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문장이 가장 사악한 집단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웠다. 정말 그들도 바다를 생각하면 가슴이 뛸까?
보르헤스는 소설 <독일 레퀴엠>에 한 나치 전범을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소설은 유대인 수용소의 부소장이었던 화자가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당하기 전날 세상이 자신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자신의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성장 과정, 나치당에 입당한 이후 소장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 사형수가 되기까지를 독일의 생성에서 제 3제국이 멸망하는 과정과 병행해서 기술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화자는 1908년 생이다. 브람스, 쇼펜하우어, 세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받으며 음악과 형이상학 덕분에 오랜 불행한 시절을 맞설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니체와 슈펭글러를 자기 삶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20대 초에 나치당에 입당한다. 처음에는 폭력적인 것 때문에 힘들었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나 기독교 초기와 비교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있다는 흥분을 갖고 전쟁을 고대한다. 그런데 그는 소요 사태 중 총에 다리를 맞아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개인목적론을 발견하고 자신이 부상당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순교자가 되거나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 지속해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유대인 집단수용소에 부소장으로 발령 나자 그 직책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성실히 책임을 다한다. 자기가 좋아했던 행복을 노래하는 시인 ‘예루살렘’이 수용소에 오자,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인간성을 파괴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데 ‘성공한다’. 나치가 승전을 거듭할 때는 그는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지만, 전쟁에 패하게 되자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도 하고, 이제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독일의 운명은 예수와 유대주의의 병에 걸린 세상을 구해내고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생각하며 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뻐한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자기 육체는 몰라도 정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죽음을 기다린다.
음악을 사랑하고 형이상학을 공부한 지식인이 어떻게 나치가 되었을까? 그토록 잔인하게 한 인간을 몰락시키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는 ‘독일적인’과 ‘새로운 시대’ 그리고 ‘운명’이였다.
이 소설의 제목 독일 레퀴엠은 브람스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최초로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작품을 쓰면서도 독일 레퀴엠이라기보다는 인류 레퀴엠이 더 적당하다고 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더욱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라 한다. 또 당시 독일어로 작품을 쓴 이유는 독일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대중에게 친숙한 독일어를 쓴 것이기 때문에 ‘독일적’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작가가 제목으로 독일 레퀴엠을 잡은 것은 독일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독일적’으로 불리는 것의 의미 왜곡을 드러내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독일적인’ 것에 경도되어 있다. 그는 그의 조상을 ‘독일적인’것과 관련된 사람만 언급한다. 자신은 고문과 살인으로 사형수가 되었지만 독일과 관련된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공을 세운 선조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들이 곧 자기 자신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작가는 ‘편집자 주’의 형식으로 화자가 자신의 선조 중에 가장 유명한 헤브라이어 학자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그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독일적인’ 것을 찾는다. 쇼펜하우어에게서는 논리를 브람스와 세익스피어를 통해 무한히 다양한 세계를 배웠으며 자신이 그렇게 ‘극악무도’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세익스피어를 거대한 독일계 이름을 가졌다며 슬며시 ‘독일적인’ 것으로 편입시킨다. 그가 언급한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쓴 문명사학자이다. 그는 전쟁과 혁명으로 정점에서 무너지고 있는 서구 세계를 썼으며 독일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인데, 화자는 슈팽글러를 비판하면서도 그에게서 독일적이고 군인다운 정신을 발견한다.
화자가 열망한 새로운 시대는 유대교에서 비롯된 기독교 문명을 뒤엎는 새로운 도덕률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는 나치즘을 본질적으로 도덕적 행위인데 그것은 이미 부패한 노인에게 옷을 벗겨 새사람에게 옷을 입히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폭력과 칼이 중심이며 음험한 동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일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패전과 더불어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세계 공항을 겪으며 불안과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독일을 타락시킨 저 더러운 유대인들 때문이라면, 단지 경제적 불만을 넘어 정의의 소명으로 화자는 나치가 되었을 것이다.
화자는 개인목적론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운명으로 나아가며 독일이라는 국가도 세계사 속에 역할과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상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미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긴다. 자신이 수용소에 자행했던 잔혹한 행위도 소명에 충실했으므로 정당화된다. 자신의 조상 중 ‘독일적인’인 인물을 자신과 연관 시킨 것처럼 독일의 계보도 게르만 민족의 추장인 아르미니우스에서 시작하여 루터와 히틀러를 연결하여 찾는다. 그리하여 비밀스런 소명을 갖고 있는 독일 제국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파괴를 했어야 했다며 ‘조국의 운명을 바쳤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종교적 흥분상태에서 나타나는 독단이 된다. 이런 유의 운명을 믿거나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합리적 판단이 어렵다.
이 소설과 장르는 다르지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아히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렌트에 의하면 아아히만은 평범한 사람인데 단지 생각하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화자는 확신에 가득차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 노력한다. 그는 상당 수준의 교양을 갖춘 사람이며 애초에 폭력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애국심이나 변화에 대한 열망, 역사나 운명을 믿는 태도는 좋은 사람들도 흔히 갖고 있다. 아렌트는 모두에게 철학을 해야 하는 짐을 지게 했는지 모르지만, 악행에 참여한 다수를 ‘생각이 없는 자’로 만들어 그들의 죄를 가볍게 한 면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생각이 없지 않고 타인을 해롭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까?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동정심이다. 화자가 인간성의 마지막 기로에 섰을 때는 수용소에서 그가 좋아했던 시인 예루살렘을 만났을 때다. 그는 갈등 끝에 동정심을 짜라스투라 최후의 죄로 여기며 예루살렘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작가는 예루살렘이 자살한 날을 화자가 부상당한 3월 1일로 같이 맞추어 예루살렘의 죽음은 곧 화자의 죽음이라는 암시를 준다. 연민과 폭력은 생존을 위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다. 폭력이 생존을 넘어 지배를 위해 사용될 때, 내면의 연민을 파괴한다. 그러면 어떤 정당화도 소용없이 그를 메마른 인간으로 또는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과 떨어져 사는 나도 지난 노동절에 집회에 갔다. 집회의 마지막은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나는 인터내셔널가를 잘 알지 못해서 아는 부분만 겨우 팔을 흔들며 불렀다.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오래된 습관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감정은 나치의 것과 다른 것일까?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은 자본에 대한 적개심일까?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나오는 연대일까?
우리가 숨 쉬던 공기에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바다를 느낀 것처럼, 우리 가슴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고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