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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의 서재
  • 멜랑콜리아 I-II
  • 욘 포세
  • 15,300원 (10%850)
  • 2023-10-13
  • : 14,05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 읽어서는 안되는 소설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소설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과 같이 우울의 늪에 깊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읽는다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욘 포세의 문체는 우울을 묘사하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단문으로 반복하여 서술하는 문체는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독자는 더 어렵다. 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데다가 화자가 주절거리는 말 속에서 단서를 건져 올려서 줄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스는 가난한 데다가 노르웨이 출신이고 퀘이커교 집안 출신이다. 가난한데 시리아 출신이고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라 생각하면 조건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소외되고 배척당한다. 그의 세계는 빛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또 다른 희망의 빛으로 발견한 사랑에서 마저 버려지고 그것으로 인해 내쫓기고 만다. 세상에서 내쫓기면 그 사람의 세계는 우울함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병원의 규칙을 따르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어기면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 그의 선택은 병원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다. 사회적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라스의 머리와 수염을 잘라야 하지만 라스에게는 자존심이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올리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올리네는 노인이 된 라스의 누나이다.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과거만 기억한다. 독자는 그녀가 떠올리는 라스의 기억에서 라스의 삶을 조각을 맞출 수 있다. 오전에 동생이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지만 기억하지 못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다리가 너무 아파 걷기 힘들어 생선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더구나  용변을 조절할 수 없어서 생선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용변을 봐야 한다. 자신의 상태에 당혹해하지만, 이웃의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 어쩌면 라스는 특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올리네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미래다. 사회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자존심은 무너지고 생존은 어려워지고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을 보기가 어렵다. 그들에게 생각 능력이 없어졌거나 현저히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욘포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의 의식을 들추어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치매 환자의 당혹과 절망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고 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질 때를 상상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세계를 가진 인간은 주류세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라스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그림은 권위자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자위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보조원은 그의 자위를 감시한다. 그래서 그는 본능과도 싸워야 한다. 프로이트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올리네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는 타인과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거의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 우울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화가다. 그의 그림을 그의 고향 바다를 그린 것 같았다. 풍경화인데 아주 무겁고 둔탁한 것으로 툭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빛은 멀리서 오는데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감돌고 있다. 구름과 바위는 무언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고 꿈틀꿈틀 움직일 것 같다. 역동하는 에너지와 짓누르는 어떤 힘이 충돌하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울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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