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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하우스 - 불안에 갇히는 곳
피요르에서 태어나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까? 험준한 암벽 사이로 짙푸른 바다가 길게 들어와 있고 마을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아름답지만 척박한 곳이다. 드라마 바이킹에 나오는 인물들은 너무나 용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에 애착이 적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신 오딘은 외눈의 우울한 신인데 그의 전사를 죽게 해서 발할라로 부른다. 그래서 그들에겐 죽음이 늘 가까이 있어 보였다. 보트하우스는 피요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여기에는 바이킹처럼 용맹한 인물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소심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서른이 되도록 어머니 집에 얹혀살고, 가끔 임시직 일과 기타 연주를 한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바이킹처럼 피요르를 떠날 용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불안하다. 혼자 피요르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불안이 심해지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쓸 뿐이다.
그는 단문을 쉼표로 이어가는 글을 쓴다. 사건을 반복하여 말하고 같은 사건을 다른 이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불안이 엄습해 온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을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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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난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결혼 했고, 두 딸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 였다.
(중략)
나는 크누텐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게 내가 두려워해 왔던 거지,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옛 친구를 마주치는 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난 예전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여,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원어(노르웨이어)로 읽으면 운율이 느껴진다는 이 낯선 문체는 자폐 아동의 반복하는 혼잣말과 비슷하다. 생각하여 정리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의식 속에 떠오르는 사건은 의지로 제어하기 어려워 여러 사건이 섞이고 시간도 제멋대로다. 어떤 사건은 떨쳐 버리려 애를 써도 자꾸 반복된다. 이 반복하는 사건이 의식의 주류가 된다. 이 소설의 화자에게 그것은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는 왜 불안한 걸까? 그는 불안의 이유를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 독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화자의 주절거리는 말속에 실마리를 찾아가야 한다. 피요르에 사는 두 소년(화자와 크누텐)은 보트하우스에서 놀았다. 주인이 방치하여 몰래 들어가 구축한 그들의 아지트. 병, 조개껍데기와 같은 수집물이 있고, 어른들이 모르는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도 불안은 있다. 주인이 와서 바깥에서 빗장을 걸어버리면 갇히게 되는 불안. 밴드를 하는 두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 소녀. 두 친구와 그 소녀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는데 두 소년만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일 때문에 크누텐은 밴드를 그만두고 마을을 떠났고 마을을 방문할 때도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크누텐은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왔다가 보트하우스 옆 길에서 십수 년 만에 화자를 만난다. 이때 화자에게 불안이 엄습한다.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신경 쓰이고, 크누텐의 아내는 화자를 유혹하고, 크누텐은 아내를 의심한다. 불안한 화자는 연주도 그만두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서 글만 쓴다. 여름이 지났을 때 또 다른 사건은 일어나고 진실을 아는 것은 두 사람뿐이다. 불안은 해결되지 않고 이제는 글조차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보트하우스에 영원히 갇히게 된 셈이다.
그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불안했을 때를 반복하여 말한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가오면 불안하다. 그녀와 함께할까 봐 불안하고 그렇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이 불안은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화자에게는 음악을 하게 된 힘이었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른 이에게 눈길을 준다면? 또 불안하다. 그녀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할 수 없다. 친구는 떠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건을 다시 떠올릴 만남이 두렵다. 비슷한 일이 또 생길까 불안하다. 이제 불안에 영영 갇히어 살게 되었으니 불안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이킹은 나침반도 없이 막막한 바다로 나아갔는데,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화자는 왜 불안에 갇히는 것일까? 삶의 척박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이킹과 같은 불멸의 서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모험은 불멸의 이야기로 남으며 전장에서 죽으면 오딘이 있는 발하라에 간다. 그래서 벽에 똥칠하다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고 방패를 두드리며 달려 나간다. 하지만 거대 서사가 거짓임이 밝혀진 지금 보트하우스와 자기만의 은밀한 세계에 사는 화자는 불안을 벗어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피요르에 살지도 않는데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존재로 인한 근원적 불안은 현대인만 졌던 무게가 아니다. 현대인의 특수한 불안은 무거운 이야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대가다.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내던져졌다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마냥 내던져진게 아니라 충분히 관리를 받는 편이다. 현대에는 막막함 보다는 유혹이 오히려 많은 편이다. 그래서 자유는 달콤하고 불안은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더욱 질주하는 21C의 세계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불안에 눌려서 제어될 만큼 그리 약하지도 않다.
피요르가 나오는 다큐를 보았다. 육지보다 바다로 가는 것이 더 쉬워 보이는 피요르 가장자리에 형성된 작은 마을 하나가 지나갔다. 그 보트하우스가 있음 직한 마을이었다. 외딴 마을의 낡은 보트하우스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불안 때문은 아니다. 불안을 느꼈던 처음 장소,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정확한 그곳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애틋함. 이것만으로 불안을 이길 만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 앉아 있다. 나는 혼자다. 나는 여기 존재한다. 그것이 이 불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