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욘 포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의 작가다. 호기심에 찾아 읽은 작품인데 읽은 처음부터 매우 당황했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 때문이다. 단문이 마침표 없이 쉼표로 이어지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그대로인데 다른 이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시 진술하면 이게 뭔가 한다. 그러다가 결말에 이르면 추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단순한 것 같아 던져두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읽게 된다. 그러면 그 단문들이 힘 있게 살아나고 나는 오히려 긴장한다.
욘 포세의 문장은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을 그대로 기술한 듯하다. 머릿속의 생각은 대개 단문으로 이루어지며 반복을 계속한다. 머릿속 생각은 시간 순서로 흐르지 않는다. 돌출하고 뒤섞인다. 불안과 강박이 되는 사건은 떨칠 수 없고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조금씩 차이를 만든다. 생각이 사건을 반복하여 기억할 때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화자의 강박을 드러내면서도 기억의 시간대를 섞으며 아주 단순할 수 있는 줄거리에 긴장을 만들어 낸다. 독자는 이 차이에서 퍼즐을 맞추듯 사건을 추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절대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치밀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방치된 보트하우스에서 초등학교 때 아지트를 만들고 밴드를 시작한 두 친구(화자와 크누텐)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비슷하게 반복되는 3번의 삼각관계가 있다. 특히 두 번째 소녀와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때문인지 크누텐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마을을 떠났다. 결혼하여 가족과 여름 휴가를 와서도 화자나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한다. 화자는 마을 떠나지 않고 제대로된 직업도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산다. 화자는 휴가온 크누텐과 마주친다. 크누텐은 아내와 화자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유혹하자 불안해한다.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불안일 것이다. 화자는 불안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글을 쓴다. 불안의 계기는 분명한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화자의 처음 불안은 좋아하는 동급생이 나타났을 때였다. 이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수 없어 불안해 했고 보트하우스에서 키스 놀이를 할 때 그녀가 크누텐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할까 두려워했다. 다음 불안은 밴드가 연주할 때 소녀가 화자에게 눈길을 보냈을 때다. 소녀는 처음에는 화자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크누텐을 보고 그와 이야기 한다. 다음이 10년도 더 넘은 후에 크누텐과 그의 아내를 보았을 때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보트하우스에서 화자를 유혹할 때 불안해 하고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자 불안에 견딜 수 없어 글쓰기 마저 그만둔다. 작가가 사건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은 것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사건의 폭을 넓혀서 보편적 불안을 다루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구와 행동을 반복함으로 표현할 뿐이다.
욕망의 실현 또는 좌절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을 유발한다. 이 불안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화자의 경우처럼 음악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 불안은 넓게 보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되고 존재 자체의 문제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불안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또 그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이유도 모른채 불안해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화자가 마음을 두었던 소녀와 크누 텐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본인도 이유를 모르는 불안이 증폭된다. 불안은 틀리지 않아서 마침내 사건은 일어난다. 보트하우스에 있었던 일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화자만 지게 되는 기억의 짐이 더해졌다. 그래서 화자는 더 큰 불안을 안게 된다.
기억은 아마도 보트하우스와 비슷할 것이다. 화자의 보트하우스는 주인이 방치한 틈을 타서 구축한 아지트와 같은 비밀스러운 낙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주인에 의해 빗장이 걸려 자칫하면 갇히게 될 수도 있는 불안한 곳이다. 기억의 어떤 곳에서는 조개껍데기나 유리병 같은 수집물이 남아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떨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반복하여 불쑥불쑥 솟아나 우리를 불안의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쉽게 던져 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화자가 안 됐다는 생각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작가가 사용한 문체는 불안만이 아니라 피요르를 잘 드러낸다. 피요르에 대한 묘사도 제대로 없는데도 파도 소리와 바람이 중요한 곳에 효과음이 들리는 듯 나타난다. 그 효과로 화자의 외로움과 불안이 낭만적 감성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울한데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