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태어남, 그 후
-보르헤스의 남부-
열병을 앓다가 새로 깨어난 아침은 모든 것이 새롭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나 따사로운 햇볕이나 가볍게 들리는 새소리까지 예사롭지 않다. 아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고 새로 시작하려 한다. 그런데 삶의 기쁨은 잠시일 뿐, 새로 드러나는 삶의 비밀에 마주한다면? 그 것으로 자신이 파멸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남부>는 이런 당혹감을 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줄거리는 보르헤스의 다른 소설처럼 아주 단순하다. 달만의 조부는 이민 온 목사이고 외조부는 아르헨티나의 군인으로 원주민의 창에 죽은 사람이다. 그는 부계의 영향을 받은 직업인 시립도서관 비서로 일하지만 자신을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생각했고 ‘낭만적’ 죽음을 맞은 외조부의 혈통을 선택했다. 그는 비록 도시에서 일하지만 외조부쪽의 재산인 ‘남부’에 있는 농장을 구해 둘 수 있었고 가보고 싶어하지만 가지 못한다. 어느날 천하루밤 이야기의 독일어판을 빨리 읽으려다 머리를 다치고 폐혈증에 걸려 거의 죽다가 병원에서 살아난다. 회복 후 그는 휴양을 위해 기차를 타고 남부의 농장으로 간다. 하지만 기차의 차장은 그에게 가야할 기차역보다 앞 선 곳에 내리라한다. 그는 기차역 근처의 가게에서 만난 원주민은 달만과 결투를 원한다. 가게 안에 있던 ‘남부;를 상징하는 것 같은 늙은 가우초가 달만에게 칼을 던져 준다. 그는 이것을 ‘남부’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칼을 들고 들판으로 나간다.
그런데 소설에 숨어있는 장치는 단순하지 않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시처럼 함축적이라 각 장치간의 연결과 의미를 알아내려면 긴장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특수성보다는 전형성을 뛰고 있고 단순하다. 배경 또한 마찬가지다. 병원, 기차, 가게, 남부 모두 특별하지 않고 전형성을 뛰고 있다. 그래서 다큐를 보듯이 거리를 두고 읽지만, 남부에서 벌어지는 반전에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남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달만이 여행을 시작할 때와 여행에서 마주치는 남부는 아주 달라진다.
‘남부’가 라바다비아 거리 맞은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달만은 그것이 그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며, 그 거리를 건너는 사람은 오래되고 안정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달만이 오래되고 안정적인 세계라고 여기고 있는 ‘남부’는 아르헨티나 남쪽에 있는 평원지대다. 달만의 외조부가 전사한 사막진공작전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가우초를 동원해 평원의 인디오를 몰아내는 전쟁이었다. 남부에는 주로 평원지역인데 사막이라 칭했던 이유는 문명이 없는 사막 같은 곳을 문명화한다는 백인들의 인종적 사고 때문이다. 이 전쟁에 가우초와 인디오들이 거의 몰살되었고 빈자리는 달만의 조부와 같은 백인 이민자로 대체했다. 이후 평원은 목축과 농업지역이 되어 아르헨티나의 경제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사막진공작전과 작전을 주도했던 로카 장군이 아르헨티나 지폐 100페소에 나올만큼 아르헨티나인에게 사막진공작전은 영토를 확정 지은 자랑스런 역사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남부가 품은 비밀이다. 달만에게 남부는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고 외조부의 전리품인 농장이 있는 곳이다. 달만은 새로 태어난 기쁨으로 남부로 가지만, 기차에서 남부의 낯선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이 광활했지만 동시에 은밀했고, 어떤 점에서는 비밀스럽기까지 했다.⋯고독은 완벽했고, 아마도 적의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달만은 자기가 ‘남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소설 어디에도 사막진공작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누구도 달만에게 비밀을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달만은 남부의 풍경에서 비밀과 적의가 있음을 느낀다. 이어서 그는 강제로 차에 내려야 했고 가게에서 결투를 요구받는다. 달만은 이 사건으로 남부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된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던 노인이, 그러니까 달만이 ‘남부’의 상징을 보았던 사람이 칼집에서 칼을 뽑아 달만에게 던졌고, 그 칼이 달만의 발치에 떨어진 것이다. 그건 마치 ‘남부’가 달만에게 결투를 받아들이라고 결정한 것 같았다.
달만은 운명을 받아들이듯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를 칼을 굳게 움켜쥐고 평원으로 나갔다.’그러면서 병원에서 죽을 뻔 했을 때 ‘더 넓은 하늘아래 칼싸움을 벌이며 죽었다면 해방이고 축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가 맞게 될 죽음은 외조부의 ‘낭만적’ 죽음도 아니고 해방이나 축제는 더욱 아니며 단지 복수의 제물이 된다. 천일밤의 이야기에 나오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자신의 회생에 기뻐하고 남부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던 달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낙담도 저항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가 ‘선택했거나 꿈꾸었을 죽음’이라 생각했다. 이제 남부는 달만에게 ‘오래되고 안정된 세계’가 아니라 비밀을 품은 곳이다. 자랑스런 조상의 농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농장의 지붕색처럼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적의를 가진 인디오와 가우초의 가게가 있는 곳이다.
보르헤스는 달만이 ‘비밀’로 다가가게 하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마련한다. 우연과 거듭남이다. 달만은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무자비해지는 운명’때문에 사고를 당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겨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단지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만 음미하기로 했을 때, 비밀과 적의가 드러났다. 왜 이런 통과의례가 필요할까? 달만에게는 메트릭스의 레오처럼 빨간약과 파란약을 선택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삶의 기쁨에 차서 일상에 밀려 가지 못했던 남부의 농장으로 가는 일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그가 당한 우연한 사고처럼 남부에서 운명에 휘말리듯 비밀을 느끼고 적의를 맞이한다. 비밀과 적의의 엄중함은 개인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다음의 장치는 모호함과 단순함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달만이 남부로 간 것인지 그가 열에 들뜬 환상 속에서 남부를 만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작가는 군대군대 그런 모호함을 유지하는 장치를 해두었다. 사건에 대한 묘사는 그림자 극과 같이 단순하다. 무슨 일이 왜 있었는지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인물은 큰 동양 풍경화 속의 작은 인물처럼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남부의 평원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달만은 원하지 않는 역에서 내리고 결투를 받아드리게 되고 그게 남부의 뜻이라는 것이 전부다.
보르헤스가 자주 다루는 시간의 문제는 여기서도 나타난다. 달만은 브라질의 카페에서 만났던 고양이를 통해 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의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가게에서 만나 노인에게도 영원의 시간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 가운데, 즉 연속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마술적인 동물은 현재에, 즉 영원이 순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브라질 카페의 고양이를 언급하는 부분)
오랜 세월이 그를 왜소하고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자그마했고 거무스름했으며 삐쩍 말라 있었다. 노인은 마치 시간을 벗어나 영원 속에 있는 것 같았다.(가게의 노인을 언급하는 부분)
고양이와 노인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영원히 진행형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파우스트가 외쳤던 영원히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다. 노인에게는 남부의 학살은 지나간 과거가 될 수 없고 현재 진행형인 고통이다. 그는 가게의 가구처럼 있다가 달만에게 칼을 던져 준다. 어떤 사건이 진행형이라면 그 사건은 순간의 영원 속에 있다.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지나간 사건은 잊혀지거나 주류의 기억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만, 새로 태어난 사람, 최소한 주류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은 드러나고 그 사건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콜롬비아 드라마 <예감>의 주인공 처럼 심장 이식 수술을 하여 기적적으로 살았고 새로운 사랑도 만났는데 그 심장이 계획적 살인의 결과물이라니! 예감의 주인공은 남편을 고발해야 하고 , 사건의 비밀을 알게 된 자는 부모와 조상을 고발해야 한다. 최소한 전과 같이 살 수 없고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피해자는 말한다. 4.3은, 거창, 광주, 4.16, 이태원은 끝나지 않았다고. 적당히 기념관을 세우고 추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애써 그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해도 제주도를 떠올리거나 88고속도로를 지날 때 기억은 중력처럼 우리를 끓어 당긴다. 뿐만 아니라 뉴스만 봐도 사건을 진행형으로 만드는 괴물들 거의 매일 볼 수 있다. “ 4.3은 김일성의 지령이다” “광주에 간첩이 있었다” “ 유족들은 시체 장사를 한다.” 역사는 청산되어 봉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온전한 해방이란 없다.
간 밤에 내렸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여름 나무를 비춘다. 연초록이 싱그럽게 되살아난다. 순간 마음이 환해지지만 오토바이의 거친 소음에 다시 인상을 쓰게 된다. 굳이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아도 삶은 이리저리 얽혀 온전히 아름답지 않다. 더구나 우연한 사고는 한 번에 우리의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더라도 조금의 생각을 하고 살게 뒤면 깨달음의 기쁨 뒤에 복잡하게 얽힌 뿌리처럼 우리의 발을 잡고 있는 세계를 보게 된다. 누군가 자꾸 칼을 던져주고 점점 그것을 피하기 어려워진다면 삶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뭔가 살아갈 융통성을 찾는 나는 생각해 본다. 세상을 구해야 할 때 구하더라도 산책할 수 있을 때, 향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때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임시 변통일 뿐일까?
병원에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넓은 하늘 아래 죽을 것인가? 보르헤스가 묻는다면 나는 웃으면 답해줄 것이다. 선택한다고 그대로 되냐고?
모든 것이 광활했지만 동시에 은밀했고, 어떤 점에서는 비밀스럽기까지 했다.⋯고독은 완벽했고, 아마도 적의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달만은 자기가 ‘남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