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3
요다의 서재
  •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9,900원 (10%550)
  • 2011-10-21
  • : 10,96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나침반


 처음 읽을 때는 단순한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손에 땀을 쥐는 공포나 무릎을 치는 추리도 없을 뿐 아니라 탐정이 오히려 범인의 덫에 걸려 죽는다. 맥빠지는 결론에 유대인 신비주의도 별 흥미없어 그냥 지나가려다가 ‘현실은 재미없어도 되지만 추리는 재미있어야 한다’ 말에 걸렸다. 그래서 다시 읽었고 몇 번 더 읽게 되었다. (다행이 소설은 짧아서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소설 속의 각각의 소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중국 무협소설의 진법속에 나오는 기물들을 대하듯 유칼리스나무, 병원 같은 호텔, 유대인, 갈릴리, 대칭, 거울, 지하실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르헤스가 설정한 미로에 빠진 것이다. 

 륀로트는 명탐정이다. 한 유대인 학자가 학회에 왔다가 우연히 보석을 가진 갈릴리 부자의 숙소 앞 방에 투숙했다. 학자는 ‘타자기에 하나님의 첫번째 이름이 쓰여졌다’라는 글을 써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도둑이 갈릴리 부자의 방으로 착각하여 학자의 방에 들어왔다가  학자를 죽인다. 경찰은 사실대로 추리하지만 륀로트는 ‘추리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학자의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기자는  륀로트가 살인사건을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다. 우연히 이 기사를 본 륀로트에 원한을 가진 총잡이 샤를라흐는 륀로트를 빠뜨릴 함정을 만들고 륀로트를 죽인다.

 륀로트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은 자신의 설정 때문이다. 추리는 재미있어야 하고 사물은 대칭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은 네 글자이고 지하실은 다른 곳에 통로가 있어야 한다. 륀로트에게 유대인 학자가 우연히 잡은 숙소 때문에  살해 당했다고 추리하는 것은 우연의 남발일뿐 재미가 없다. 더구나 이 학자는 삼천년에 걸친 유대인 박해를 견디고 유대교의 신비에 관한 한 질의 책을 남길 정도의 연구자다. 그에 걸맞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륀로트는 유대인 학자가 남길 글을 단서로 하여 하나님의 나머지 이름을 찾기로 한다. 이런 은밀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륀로트에겐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미로가 생기는 것은 어디론가 가는 길을 찾고자 해서 일 것이다. 단서를 찾으면 희망을 갖고 막히면 절망한다. 의지가 있으면 헤쳐가고 그렇지 않으면 주저 앉는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뭔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영광을 위하거나, 왕이나 민족을 위해 죽거나, 혁명에 피를 바치거나, 자연에 순화된 삶을 살거나, 예술을 위해 배고픔을 견디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거나, 월드컵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해야 한다. 그냥 해가 뜨고 지다니? 아폴론이 불마차를 끌고 나와야 한다. 폭풍우가 아무 이유없이 배를 위협하겠는가? 누군가 죄지은 자가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과학이 인간에게 열어 놓은 것은 완전한 무의미다. 태양의 운동은 만유인력의 결과이고 폭풍우는 기후의 변화일 뿐이다. 인간은 특별한 이유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며 이 세계의 중심도 아니다. 인간은 운석의 충돌의 결과로 인한 대 멸종 이후에 틈을 열어 살아남은 포유류 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종에 불과하다. 더구나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의 중심도 아니고 태양은 우리은하의 한 쪽 귀퉁이를 맴도는 아주 작은 일부이며 우리 은하 역시 무수한 은하 중의 하나일뿐이다. 이 우주 역시 한 순간 작은 점이 폭발하여 생겼다. 평행우주론에 의하면 이런 우주는 수없이 많다한다.


 이 소설에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의 세계를 연구하고자 하는 유대인 학자,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기독교인 경찰, 기사를 쓰고 싶은 무신론자 기자, 자기 구역의 자존심을 지키는 총잡이 샤를라흐, 유대인 혐오주의자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살인 사건에 각자의 의미를 적용하려 한다. 그리고 적어도 륀로트에겐 의미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한데도 살를라흐에게 ‘너도 하나님의 마지막 이름을 찾는가?’라고 묻는다. 륀로트는 죽음의 순간에도 살를라흐에게 이번 미로에는 너무 많은 선이 있었다며 다음 번엔 직선으로 된 무한한 미로에서 죽여 달라고 하고 죽는다. 쉬운 추리를 해결하는 데 석 달이나 걸렸다고 자책을 하던 륀로트였느데 자기가 덧에 빠진 것임을 알았는데도 자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로를 헤쳐 오는 일이 자신의 일이고 또 다음 생에는 더 괜찮은 미로 속을 탐험하겠다고 의지를 밝힌다. 적어도 륀로트는 자기가 설정한 의미를 따르며 당연히 보일 것 같은 무의미는 무시하고 다음 생에서 까지 그 의미를 따를 것을 다짐하며 죽는다. 이런 삶에는 허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분명한 방향이 있는 나침반이 있다.


 현대에는 거대 담론이 의미를 잃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밤에도 길을 알려주는 모두의 나침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손에 작은 등불하나 들고 각기 다른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을 보고 가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까? 그래서 등불은 쉽게 꺼지기도 하고 륀로트 처럼 자신의 나침반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의미를 버린다면 굳이 길을 찾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나침반도 필요없다. 미로는 일시에 사라진다. 우리는 갇히지 않고 해방 된다. 길은 해체되거나 모든 것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길이 아니라 우연이 창조해낸 목적도 시간도 없는 길이 나타난다.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의미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다. 무의미의 길에는 가로등도 나침반도 지도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서울까? 그래도 적어도 바보같이 함정에 빠졌는지도 모르거나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도 않을 다른 생에서 무의미를 반복하겠다는 자위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