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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책] 픽션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7,700원 (380)
  • 2018-11-21
  • : 3,540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 책의 새로운 저자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메나르는 새로운 기법-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현대미술을 관람할 때 가끔 황당함을 만난다. 뒤샹의 변기와 같은 작품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른들처럼 감히 말을 할 수 없지만 내면의 진실한 아이는 ‘뭐야. 이거 그냥 변기구만’라고 말한다. 그런데 옛 소설의 일부를 토씨 하나없이 그대로 쓴 작품을  놀랍고 위대하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 황당함은 말로 하기 힘들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바로 이 이야기다. 보르헤스는 능청스러워 보일 정도로 진지하고 치밀하게 피에르 메나르를 창조해낸다. 돈키호테는 질풍처럼 내달렸지만 메나르는 모든 경우를 검토하고 엄격하게 원고를 쓰고 또 버리며 온 힘을 다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화자가 말하는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 하였는데 돈키호테의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와 꼭 같은 글을 쓰고 다른 부분의 초고는 모두 없애 버렸다. 화자는 이 터무니 없어 보이는 사실을 합리화 하려한다. 메나르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인데 화자의 친구이다. 메나르는 소네트를 썼고 철학, 체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쓴 평가받을 만한 작가였다. 화자는 메나르가 한 작업 중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가장 위대한 작업이라 한다. 그가 시도한 다양한 방법을 다룬 다음 똑 같은 글을 썼지만 매우 다른 차이가 있으며 한 없이 위대하기 까지 하다고 한다. 미완성작의 초고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제 2의 메나르가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소설은 에세이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소설은 작가가 창조한 사실이기 때문에 독자는 저자의 생각과 맞서거나 동조할 필요가 없이 ‘사실’을 독자가 해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처음 당혹감에 휘둘렸지만 다시 꼼꼼히 읽으며 메나르의 쓰기는 읽기로 대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했다.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 하는데 처음 고려한 것은 ‘돈키호테를 월스트리트’에 갖다 놓는 형태로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다시 쓰기는 현대의 동화판일 테고 읽기는 지식채널e의 해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는 이 방식을 무의미한 모조품이라고 혐오했다. ‘시대착오적인 천박한 기쁨이나 미혹’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메나르가 세르반데스가 되어서 쓰는 방법이다. 온전히 16세기의 인물로 무어인과 전쟁에 참여하고 17세기 이후의 역사를 모르는 세르반데스가 되어 쓰는 것이다. 이 방식은  작가가 신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작품을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돈키호테>에서라면 작가의 의도가 기사소설의 허무맹랑함을 고발하려 했다든지, 16세기의 각 신분들의 말하기와 세계관을 고려하며 읽는 방법이다. 프로이드의 세례를 받은 현대에는 작가가 밝히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까지 찾아내는 읽기를 하려한다. 세르반데스가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고 포로가 된 경험이 있는 것이나 아버지가 이발사였다는 것을 고려하며 작품의 행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헌데 메나르는 이 방식이 지나치게 쉽다는 이유로 버린다.

 메나르는 세르반데스가 아니라 메나르로서 <돈키호테>에 이르고자 한다. 독자는 좋아하는 표현, 공감하거나 인용하고 싶은 구절을 책에서 만난다. 화자는  <돈키호테>의 한 구절 ‘강의 요정들, 고통에 시달리며 축축하게 젖어 있는 에코’에서 메나르의 문체를 찾아낸다.

 세르반데스는 ‘타성적 언어와 상상력에 이끌려 마구잡이로 써 내려 갔지만’ 메나르는 문자 그대로 다시 쓰야 한다. 작품이란 온전한 작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세르반데스가 말한 것 처럼 지방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 이슬람 작가가 쓴 이야기를 번역한 것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산물이다. 더구나 세르반데스는 ‘타성적인 언어와 상상력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써 내려 갔지만’ 독자는 작품을  토시 하나 고치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규칙을 따라 읽다가도 때로 작품에 부딪힐 때 규칙을 희생해야 한다. 시대 차이도 넘어야 한다. 메나르의 쓰기(읽기)에는 17C초의 스페인의 지방색도 없고 집시에 대한 비난이나 종교재판도 없다. 21C초의 메나르라면 성차별도 없을 것이다. 독자는 작가보다 보편적 관점에서 책을 읽는다. 작가의 지역색이나 시대의 관습에 구애됨이 없이 읽을 수 있다. 돈키호테의 무가 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장황한 연설 쯤은 관용으로 넘길 수 있다. 또 어떤 문장은 작가의 의도와 아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돈키호테>에 나오는 역사에 관한 문장을 세르반데스에게는 역사란 사실을 그대로 쓴 것이라는 의미라면, 메나르에게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 메나르에게 또 다른 어려움은 외국어고 오래된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똑 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세르반데스의 원작과 다른 문체가 되고 다른 의도를 가진다. 독자가 읽고 있는 문장이 외국어이고 또한 번역자를 거친 것이라면, 원작과는 다른 문체가 되고 그래서 독자는 새로운 해석을 한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에 의해 무한히 풍요로워 질 수 있다

 화자는 메나르가 ‘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메나르를 읽고 세르반데스를 읽었으며 베르길리우스를 읽었다. 다음은 호머가 될지 모른다. 시대의 역순이다. 책에는 인용구가 있고 그것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시대를 거꾸로 가기도 하고 건너 뛰기도 한다.  <돈키호테>는 더 이상 세르반데스에 속해 있지 않다. 독자는 시대를 역행하기도 하고 횡단하기도 하는 많은 이야기를 지나온 책이 머무는 장소다.


 메나르는 끝없이 초고를 쓰고 수정하고 수많은 페이지를 찢어버렸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지만 이 허무한 행위를 메나르는 계속하기로 한다.  ‘생각하고, 분석하고, 창조하는 것이 지성의 정상적 호흡작용’이라며 허무를 마주본다. 독서 역시 이와 같다. 독서는 (‘꼼꼼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흔적을 남기고 계속해서 지워지고 덧씌워 주는 행위이다. ‘동떨어진 이질적인 사상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우주의 비밀을 알아가며 때로 재미까지 있는  이 행위를 계속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보르헤스의 단편은 시와 유사하다. 깔끔하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독자는 인물과 사건에서 상징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제대로 읽기가 몹시 어렵고 파격적이라 처음에는 당혹감에서 시작하지만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그가 만든 미로에서 독자는 헤멜 수밖에 없지만 유쾌한 지적 유희가 틀림없다.

메나르는 새로운 기법-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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