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오고 완성되는 존재일까? -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인생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들에게 남긴 미묘한 반영을 통해
그 영혼을 하염없이 찾아가는 작업이다.
-본문 중에서-
누군가 읽지도 않은 책의 이야기를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그가 몹시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쟁이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소설을 읽은 것 처럼 줄거리를 설명하고 많은 실명의 평론가나 작품을 동원해서 아주 진지한 어조로 설명한다면 몹시 황당할 것이다. <알모타심으로 접근> 바로 이런 구조인데 이 자체가 소설이다.
단편소설집 <픽션들>의 두 번째에 나와서 소설이라 첫 번째 보다는 좀 쉬울 거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어려운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재미는 더 없다. 서평을 찾아봐도 보르헤스가 쓴 에세이 형식의 소설 중 처음이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평외엔 별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다. ( 이 소설은 그의 에세이집에도 실렸다 한다.) <틀뢴~> 역시 가상의 책의 이야기이지만 책을 발견하고 그 책에 얽힌 비밀결사가 밝혀지는 과정이 있어 이야기 구조라도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냥 서평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고 가상의 다른 이들의 평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나는 가상 소설의 서평의 서평을 쓰고 있다. 보르헤스의 표현에 의하면 이 작품을 더 풍성하게 하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화자는 두 영국 작가가 가상소설을 신비주의적 속성을 가진 탐정 소설의 기법을 가진 작품이라 했는데 이 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겠다고 한다. 가상소설은 1932년 봄베이에서 출간하여 성공했다. 1934년 영국의 큰 출판사가 유명작가의 서문과 삽화를 붙여서 재출간 했다. 화자는 초판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두 개의 판본 사이의 차이점을 요약해 놓은 부록을 갖고 있다. 법대생이고 부모의 종교와 다른 이슬람교도인 주인공이 힌두교도를 살인했거나 했다고 생각하여 도망간다. 도망가는 길에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들은 어떤 사람을 또 찾아 나서기를 반복하다가 깨달음의 사람 알모타심을 찾기로 한다. 많은 곳을 전전하다 결국은 그가 처음 떠났던 봄베이로 돌아와 어떤 진열실에 알모타심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 다음은 화자가 덧붙이는 평과 소설이 영향을 받은 작품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화자가 언급하는 책과 작가들의 주석을 달아 놓았지만 내가 모르거나 읽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언급한 책의 줄거리를 단 하나 알 수 있는데, 이 소설의 끝문장에 작가가 남긴 각주 때문이다. 이 각주에 <새들의 회의>를 요약하는데 여행과 수련으로 단련되어 성화되는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시작하여 알모타심을 구상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려는 것은는 것은 아니라 반복되는 유사성과 차이를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두 판본에서 차이가 나타남을 언급한다. 1판에 알모타심은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나왔는데 2판에서 신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과도 유사성을 갖는데 이 사실은 작품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찬탄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도 사람을 찾는 행위를 계속하며 유사성을 갖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 보르헤스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들은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를 다시 쓴다고 한다. 결국 많은 작가의 작품은 오래된 신화나 누군가의 작품을 반복하지만 차이로 인해 평가를 받는다. <틀뢴~>에도 복제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원본을 복제하면서 차이가 있는 사본들이 계속 나타난다. 우리가 하는 기억은 기억할 때마다 다른 복제본이다. 그나마 소설로 나온 1판과 2판은 차이를 구분하여 변화를 추적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기억은 제대로 차이를 추적하기 어렵다. 이 소설의 화자가 원본을 구하지 못한 것 처럼 우리 기억의 원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힌두교도를 정말 죽인 것인지 아니면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유전자의 복제이고 복제를 반복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에서 언급된 가상소설은 탐정소설의 구조가 아니라 성장 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다. 아버지의 종교를 부정하거나 죽이고 방랑을 떠나고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온다. 마지막 알모타심을 만나러 들어가는 부분에서 끝난 것은 그가 바로 알모타심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처음 언급한 두 작가의 평에서 다른 부분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야기의 유사성을 말한 것을 보면 누군가의 작품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악평을 받을 이유가 아니며 삶이란 이야기를 반복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도 하다.
모든 인류가 그랬듯이 나도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다. 석가가 말한 인생의 4가지 고통 역시 시대에 따라 내용과 질에서 달라져 왔다. 노화를 극복하는 기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수명을 늘렸고 병의 고통으로부터 꽤 많이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반복되는 이야기도 더 많이 변해야 한다. 어쩌면 아주 새로운 이야기 구조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알레고리처럼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는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떠난 곳을 말하는 그 원본은 너무 빨리 변해서 비슷하지도 않은 만큼 다른 장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알모타심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떤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펼쳐냄이고 그것이 자신이 세계속에서 창조한 고유성이다. 우리가 어떤 완성된 존재로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을 계속하듯 또 다른 내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여행에는 끝이 있고, 약간 더 낮은 가능성은 (나도 나이를 먹었으므로) 나의 세계는 더 느려지고 침침해져 갈 것이라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