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질서라는 외형만 갖추었다면 어떤 체계나 대칭도 - 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 - 인류를 매료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틀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목을 보고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우크바르는 브래트니커 백과사전의 한 복제판에 이상하게 삽입되어 있는 허구의 지명이름이고 틀뢴은 우크바르의 문학 중에 서사시에 나오는 행성의 이름이다. 이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의 이름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다.
‘틀뢴~’은 보르헤스의 소설집<픽션들>에 나오는 첫단편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에 행성 규모의 방대한 지식체계를 담고 있어 미궁을 헤매고 나서도 많은 숙제를 남긴다. 작가가 서문에 써 놓은대로 방대한 양의 가상의 책을 요약 논평하는 것과 이 책이 만들어진 비밀과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병행하는 구조다. 비밀만 보면 장미십자회의 아류인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행성의 문명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심해야 한다.
첫 문장은 우크바르를 발견한 동기가 거울과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라고 시작한다. 친구와 일인칭 시점 소설에 대해 토론하다가 복도 끝에 있는 거울을 인식하게 되고 친구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표현을 백과사전에서 봤다고 하고 그 백과사전을 찾아 나서는데 백과사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고 화자의 아버지 친구인 애시의 책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비밀이 드러난다. 17세기 어떤 비밀결사에 의해서 하나의 국가로 고안되어 만들려 한 것이 후대에서 행성 규모로 백과사전을 만들게 된다. 그후 틀뢴에 관한 백과사전과 유물이 모종의 계획으로 ‘발견’되어져 틀뢴은 세상에 알려진다. 나치즘에도 열광했던 세상은 더욱 정교한 체계와 대칭을 갖춘 틀뢴에 열광한다. 세상은 틀뢴의 세계관으로 채워지고 더 많은 틀뢴의 세계가 생성되고 풍성해진다. 그리고 앞으로 백년 후에서는 틀뢴 제2 백과사전이 나올 것이며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개의치 않고 옛책을 옛문체로 번역해 놓고 출판할 생각도 없이 원고를 손보고 있다.
접속사는 거의 없는 간결한 문장인데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난다.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규모와 고대와 현대를 왔다갔다하는 다양한 인물의 등장, 넓게 언급되는 철학과 문학, 환상적인 시간과 공간, 서양 사회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곳인 이슬람과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우선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간결한 문장 중에는 다음과 같은 화려함도 있다.
‘ 밤 중의 밤’이라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 천국의 비밀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욱 달콤해진다. 하지만 그런 천국의 문이 열렸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저녁에 느꼈던 그런 황홀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자가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발견했을 때를 표현한 문장이다. 저자의 주에 의하면 밤중의 밤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천국이 내려왔다고 하는 성스러운 밤, 라마단의 마지막 밤이다. 내게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떠오르며 더욱 신비하고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지식들은 그 사람의 세계와 감성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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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나면 책 표지를 보지 않더라도 <그림 그리는 손>이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는 손을 따라가면 또 다른 손이 그 손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 안에 있으면 이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미로에 갖힌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손이 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우크바르로 만들려한 것이 틀뢴이 되고 사본이 나올 때마다 어떤 것은 지워지거나 희미해지고 또 덧 붙혀진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그 엄밀함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잊혀지고 틀뢴의 세계만 계속하여 풍성해진다. 실존하는 인물과 작품이 허구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허구와 실재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그러다 머리가 무거워질 때 고개를 들고 다시 보면, 그림 그리는 손 자체가 그림인 것 처럼 이 세계는 보르헤스가 만든 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백과사전의 제작은 계몽주의 시절의 백과사전학파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백과사전학파는 ‘올바른’ 지식을 대중이 알게 된다면 세상은 합리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틀뢴의 제작자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했는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우크바르에서 틀뢴이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중 인물 버클리는 ‘필멸의 인간들도 우주를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백과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작가는 단지 백과사전 11권 만을 요약하여 틀뢴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틀륀의 세계는 로크-버클리-흄-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철학과 비유클리드 기하,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영역을 볼 수 있다. 관념론이 지배하고 따라서 심리학이 가장 기본 학문이다.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범신론이 주류가 된다. 언어에서는 명사보다 형용사가 우선이 되며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며 차이를 갖는다.
19~ 20C전반에는 절대적 진리가 무너지고 심리학이 대두되었고, 유클리드 공간이 유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알게 되고, 지식은 확실성과 객관성이 의심되었다. 더불어 제국주의, 공산주의 혁명, 나치즘이 광풍처럼 지나갔다. 이런 시대를 인간이 만든 하나의 미로체계라는 것을 더 정밀한 체계인 틀뢴으로 구성하여 보여 준다. 우리는 여러 개의 틀뢴을 알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같은 종교적 틀뢴과 절대왕정과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같은 정치 경제적 틀뢴이 그것이다. 유발할라리는 종교와 이념을 많은 사람이 믿는 가짜뉴스라고 했는데 <그림 그리는 손> 처럼 자기 증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표현하려면 틀뢴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기독교의 세계는 전형적인 틀뢴이다.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문서와 구전되는 이야기와 유물의 적절한 편집으로 기독교의 세계가 나타나고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등의 영역으로 더욱 풍성해진다. 인간은 두루마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구전은 계시가 되고 권위를 가진 성서와 장엄한 성당 그리고 신이 주관하는 우주가 인간을 둘러싼다.
틀뢴의 세계에서 본 흥미있는 부분은 사물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명사는 사물의 관념을 낳는데 형용사는 사물의 속성이다. 형용사가 추가될수록 사물의 속성은 확장된다. 그러나 형용사 역시 언어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다. 다음은 사본의 개념이다.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고 창조된다. 틀뢴 자체가 사본이며 창조물이다. 현실이며 또 허구다. 기원은 아예 없거나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형용사 부분은 라캉, 반복과 기원은 들뢰즈와 데리다, 틀뢴은 푸코에서 그 비슷한 개념을 본 것 같은데, 이 책의 서문이 1941년 이고 그들은 1968년 이후에 주로 활동했으니 그들이 보르헤스를 자주 언급한데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보르헤스는 대담에서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말한다.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허구 속에서 구축된 틀뢴일 뿐이라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는 허구로 구축된 틀뢴일 수밖에 없으므로 더 미적 완성도가 있는 허구에 빠져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일까?
푸코는 시대의 어항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우리는 각 시대의 어항에 갇혀있어 늘 그 시대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든 허구인 틀뢴에 갇히는 것이나, 그 시대의 인식의 한계로 세상을 이해하는 어항이나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나 회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이 소설에서도 종교와 나치즘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진 틀뢴이 붕괴시켰다고 한다. 인간이 지나 온 역사는 여러가지 틀뢴을 깨뜨리는 역사였다. 설사 그 결과로 또 다른 틀뢴을 만나거나 또 다른 반복의 이야기라 해도, 그것은 시대를 극복해 온 결과물이다. 불가지론으로 우리는 세계에 대해 어차피 알 수 없으므로 허무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인류는 혁명적 지식을 만들고 영역을 넓혔으며 허무를 극복해 내었왔다. 그리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 더욱 관용적이 되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양자역학이 측정하는 정밀도는 엄청나다. 그냥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좀 더 과학적인 확실성으로 다가가고 있고 실제로 그 만큼 인간의 삶을 개선했다. 적어도 현대의 인간의 다수는 신분과 종교,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않다.
보르헤스는 관념의 세계나 범신론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세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꿈, 상상력, 아름다움에서 더 풍부한 세계이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판타지를 좋아한다. 낮의 세상은 더 건조해 지기를 원한다. 맑은 바람이 머리 속으로 불어오는 것같은 세계를 원한다. 밤에는 더 재미있는 상상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다양한 틀뢴에서 살아가며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며, 닿지 않는 세계를 꿈꾸거나 잠들 수 없어서 거리를 헤맬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2.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