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
윤도현 닮은 사내가 어린애와 길에서 놀고 있었다. 버스같은 큰 차. 내리막이었고 내가 운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운전석에 있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발을 뻗어 브레이크를 찾았다. 문득 초록 빛. 인동초 넝쿨과 애기 사과나무. 어디지? 무중력 의자. 악보대 위에 올려진 태블릿. 내가 잠들었나 보다. 보르헤스의 <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를 읽고 있었어.
화자는 청년시절에 세번 정도 만났던 푸네스를 반세기가 지난 후에 기억한다. 푸네스의 일반적 이야기와 하루밤의 대화를 간접화법으로 써 놓은 형식이다. 푸네스는 우루과이의 시골 농장에 일하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다. 푸네스는 시계처럼 정확히 행동하는 소년이었는데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의 기억력은 가히 라플라스의 악마 수준이고 학습력은 사전만 가지고 라틴어를 익힐 수 있다. 모든 운동량을 관찰하고 모두 기억한다. 나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면 구름의 변화와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궤적과 잎사귀들의 섬세한 떨림, 금붕어가 남긴 수면의 파장까지 다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으로 푸네스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으며 전신마비 상태에서도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는 모든 것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마땅해 할 정도다. 푸네스는 나중에는 넘치는 기억의 압력으로 잠조차 들지 못하지만 이른 죽음으로 기억에서 해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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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떤 지식인은 푸네스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푸네스에겐 신체 마비이다) 하지만 푸네스의 능력은 지식인에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지식의 특성은 차이를 넘어 보편을 발견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사물을 분석하여 근원을 찾고 모든 운동을 나타내는 하나의 식을 찾는 것이 과학의 꿈이다. 푸네스의 세계에는 보편이란 없다. 겨우 10개의 수의 조합으로 모든 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수마다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한 사물을 겨우 1분이 지나도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비옥한 세계, 곧 바로 느낄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하는 세계’다. 이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고유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여 또 다른 ‘나’가 된다. 하여 나는 정의 할 수 없다. 보르헤스의 표현을 빌리면 형용사가 추가 될뿐이다. 지금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를 읽은’이 들어갈 것이다.
80대의 보르헤스는 죽음을 구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기억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사라짐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는 읽었던 책을 반복하여 다시 읽는다. 깊이 숨은 기억이라 할 수 있는 꿈에서 영감을 찾는다. 보르헤스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있는 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떤 기억은 잊지 않으면 힘들고 어떤 기억은 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경사로를 굴러가는 버스 안에 있는 나와 무중력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연결하려면 기억이 있어야 한다. 두 장소에 있던 내가 다른 주체일 수 없는 이유는 브레이크를 찾기 위해 발을 애타게 버둥거렸던 느낌을 내 신체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푸네스는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억은 그리움과도 연결 된다. 그리움은 시간이나 사건만이 아니라, 신체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이다.(파우스트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젊은 날의 신체로 되돌아 갔다! ) 신체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푸네스처럼 갖힌 자가 된다. 남는 것은 기억과 망각 사이의 어떤 것 뿐이다. 우리는 기억만이 아니라 신체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산에서 산책을 하다 멋져보이는 새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미 어두웠졌기에 기억하는 나는 가지마라는 경고를 보냈는데도 신체의 활력을 쫓는 나는 그 길을 가고 말았다. 노화로 인해 우리는 신체능력을 점점 잃어가지만 부당하게도 푸네스의 능력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더 많은 망각이 불청객처럼 온다.
서서히 죽음이 오고 그것이 무언가로 부터 우리를 해방한다면,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기억의 고통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