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에 파고든 덧니가 보인다면
<최애, 타오르다>를 읽고
나는 중학교 때 일본 아이돌을 좋아했다. 바다 건너의 아이돌을 좋아하면 인터넷이 아이돌과 닿을 수 있는 전부였다. 아이돌의 팬카페에 가입해 가입인사글을 올렸더니 이런 리플을 달렸다.
"반가워요. 누구 담당이신가요?"
작가는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나와 비슷한 세대에게는 오시라는 말이 익숙한데, 일반적으로는 실태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이 책이 왜 궁금했을까, 생각해보면 바로 저 기억 때문이다. 나는 '오시'라는 말보다 '담당'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오시'라는 말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나뭇잎을 앞으로 밀어내는 느낌이라면, '담당'은 안으로 단단히 모인 힘을 한 번씩 분출하는 느낌이다. 내가 '오시'라는 말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느낌이 맞는 건지, 아니라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카리, 아카리의 최애가 팬을 폭행했다는 사건도 인상적이지만, 나는 아카리가 최애를 사랑하는 방식(방식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적당한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애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라며 밀어낸, 그가 느끼고 바라보는 세계를 저도 보고 싶어요. (p27)
"수평선에 덧니가 파고들며" (중략) 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자욱했다. 어두운 구름은 해변 가까이 서 있는 집들을 감추었다. 최애의 세계에 닿으면 보이는 세상도 달라진다.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 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p38)
저 문장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건 중학교 때 좋아했던 아이돌이 아닌, 뜻밖에도 과거에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 또한 아카리처럼 그가 느끼고 바라보는 세계를 보고 싶었다. 나는 나의 내밀한 부분들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라며 숨겨뒀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길 간절히 바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사랑은 결국 내가 가장 받고 싶은 것, 부끄럽게도 그런 모양이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p69)
아카리에게는 일정한 간격 속에서 최애가 '불타오르며'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나는 상대와 대화하며 거리가 가까워졌다가, 내가 뭔가 저질러서 (또는 상대방이 뭔가 저질러서)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기억은 소설 속 아카리의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라, 소설 속 표현처럼 이야기에 몰입하다 못해 '흐무러져' 따라갈 수 있었다.
아카리가 마사키를 '오시'라 부를 때 내가 느낀 '관계 맺기를 바라지 않고 퍼붓는 애정'의 존재. 그리고 그 사랑 앞에 찾아온 위기 속에서의 아카리. 아카리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그 애정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아카리는 비가 내리는 수평선에 파고든 덧니를 볼 수 있는 사람.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사랑, 나는 사랑이라고 되뇌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