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belleunhi 2024/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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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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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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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가톨릭출판사 2024.2)
찬미예수님~
캐스리더스 3월의 도서는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입니다. 발타사르의 책은 내용적 무게가 있어서 쉽지 않은편이라 마음 먹고 읽어야 하는데요, 이번 책은 일단 두께가 상당히 얇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크게 어려운 부분 없이 핵심 포인트만 적혀져 있어서 발타사르 책이지만 무난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예전에 장례식엘 갔었는데 가장 가슴이 찢어질 고인의 어머니께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연도를 드리시는 모습에 놀란적이 있었다. 문상객이 애통해하며 서럽게 우니까 오히려 엄하게 화를 내셨다. 정서적으로 참 생소한 광경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많이는 아니지만 몇 번 다녀온 장례 미사때에 오히려 고인의 지인들이 눈물을 닦고 있지 정작 가족들은 크게 우는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어른들이 아들 있는 집은 상가집이 조용하고 딸이 있어야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며 아들보다 딸이 낫다고들 말씀하시기도 했는데 심지어 어떤 분은 딸만 셋인데 아무도 안울고 있었다. 워낙 어릴 때 봤던거라 이유는 기억이 안나지만 신문 칼럼에서 한국인과 서양인의 장례식 눈물의 차이를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3월 캐스리더스 도서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읽고 드디어! 그 의문이 해결이 되었다. 한국인은 장례식 때 우리곁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로 아쉽고 애통해서 서럽게 우는 것이고 서양 문화는 그리스도교가 바탕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에 울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인 죽음의 의미는 생명 전체가 모든 기능과 함께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순히 ‘무’ 나 ‘절멸’이 아니다. 자신을 선사해주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상태이다. 이전의 인간에게 죽음이란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가장 수준 높은 생명의 상태에 이르셨다. 그로부터 인간에게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희망적 메시지를 주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당신의 죽음만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당신의 생명력 안에 보편적인 죽음을 일치시켰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보편적 가치를 갖는 죽음을 향해 집중되어 있으므로, 그 분께서 선사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이 죽음에서 출발하여 성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스도 인들에게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죽음에서 생명을 살게하는 성사들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실재는 순수 현세적인 것에 대해 금욕하고 그리스도의 사명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을 살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산 이들은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숨어 살기 위해, 죽을 운명으로 조건 지어진 이 세상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존재는 저 천상에서 진정 자기 존재를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차원에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는 ‘이타적 존재’가 된다.
이상은 가톨릭 출판사 3월 캐스리더스 서평 도서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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