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이 쓰인 시기의 상황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믿는다. 작가를 작품에 그대로 투영해서 보는 건 옳지 않겠지만, 적절한 사전 지식이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러한 ‘문학 강의’는 문학 작품을 깊이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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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집필한 블라디미르 나보포크는 ‘20세기가 낳은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면서 미국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저서는 아무래도 『롤리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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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가 직접 대학에서 교수로서 강의했던 강의록을 적절히 편집해 엮은 것으로 나보코프에게 문학이란. 특히 러시아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담고 있다. 시대별로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막심 고리키에 대해 구성되어 있으며 자필 원고나 메모 형태로 남아 있는 강의록 또한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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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 독자들이 갖고 있을 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낸다. 예를 들자면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가 사회를 풍자하는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도스토옙스키는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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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사례 연구를 참고해서 도스토옙스키의 등장인물들을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병의 종류를 중심으로 분류해 보았다. (중략…) 도스토옙스키 주인공 중에는 사이코패스가 많다. 스타로브긴은 ‘도덕적 정신 이상’, 로고진은 ‘호색증’, ‘라스콜니코프는 ’명백한 광기‘, 이반 카라마조프는 반쯤 미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인격 해리 증상을 보인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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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 안 되는데 여기는 보고 너무 어이없어서 한참 웃은 부분.
누가 도스토옙스키 작품론을 이렇게 쓰냐구요.
그 ’누구‘가 바로 나보코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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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었던 소설을 나보코프의 색다른 시선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직 읽지 않은 소설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이 책이 어렵다고만 느끼던 러시아 문학에 관심과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나보포크의 강의를 생생한 직관 수준으로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께『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추천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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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만듦새에 관하여]
- 톤 다운된 컬러의 패브릭 커버 + 양장본에 환장하는 나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 책등의 글씨 색깔도 진한 검은색이라 종이 커버를 벗기면 어떤 책인지 알기 힘들다는 게 매력 포인트! 게다가 폰트가 기존 책에선 보기 힘든 종류로 제작되어 있는데, 덕분에 강의의 내용이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을유책이 참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