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 벨로에 대한 작가 정보를 하나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
현대문학 세문단 신간 알림을 해두었어도 '솔 벨로'라, 모르는 작가인데 하고 넘어갈 뻔했다! 그런데 역자인 김현우 번역가님의 새 번역 작품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존 버거, 레이첼 커스크 등 '김현우 번역'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 없이 가장 먼저 뒷표지에 소개된 단편 '나를 기억하게 해줄 것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너무 많은 일이 진행 중일 때,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일이 진행 중일 때,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너의 삶은 턴테이블처럼 빙빙 돌고만 있다고 생각해버릴 수도 있겠지. 그러다가 어느 날 네가 턴테이블로 여겼던 것, 매끄럽고 평탄하고 고르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혼란이고, 소용돌이임을 알게 된단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실은 자기가 어렸을 때 우연히 만난 어떤 여자랑 자볼려다가 옷 도둑맞고 ㅈ될뻔한 이야기라는 거... 그걸 아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거... 하지만 다행히! 아주 다행히 솔 벨로는 이렇게 거칠고 저속하게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고 '물려줄 재산은 많지 않지만' 유산처럼 이 이야기가 자식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담담하고 다소 자조적으로 전한다. 이걸 전해들은 아들이, 그리고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아버지를 기억하게 될 지는, 다 다를 것 같다.
(아들아 너는 책만 읽고 어수룩하게 살다가 현실에 된통 당하지 말거라)
?? 이것도 매우 거칠고 저속한 요약이로군요...
사실 여기 나오는 책 좋아하는 아버지는 다른 단편들에도 있다. '사촌들'의 주인공인 아이자도 전문 법조인이긴 하지만 사무실에서 시베리아 지역의 민속지학 두꺼운 보고서 읽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어떤 도둑질'에 나오는 네 번째 남편도 '게으르고 뻔뻔하게 무능'한 실업자인데 집안에서 당당하게 추소 읽는 남자다... (나도 일 안하고 집에서 당당하게 추소 읽고 싶어요)
이렇게 책을 읽는다거나 현실을 제대로 못 읽고 산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현실을 살아 씹덕아' 라고 자조하는 사람들이 주로 나오는데 이들은 너무 외로운 것 같다. 외로워서 자기랑 같은 동족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한 쌍의 인간'이라 칭하기도 하고, 닮은 누군가를 책임지고 돕고 싶어하며 그러다 결국 나는 '동시대인이 아닌' 존재로서 현실 세계를 잘 모른(무심한) 죄로, 뒤떨어진 죄로 인한 청구서를 받아든다. 대가를 치루며 털썩...

위 문장은 '사촌들'의 문장이다. 두 번째로 읽은 단편이 바로 이건데, 나는 이 이야기가 가장 재밌었다. 재밌었다기보단 우리 일가친척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비교되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였나 읽을수록 몰입이 됐다.
+) 여기서 잠깐, 솔 벨로의 단편들이 분명 한 번에 후루룩 읽히는 건 아니다. (단편임에도!) 스토리를 따라가면 길이 엉키거나 길을 잃는다. 그러니까 여기선 스토리나 줄거리에 집중하면 어렵다는 거다. 처음 한번을 그렇게 읽었다가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줄거리는 이제 알고 있으니(사실 단순하다) 좀더 문장 하나하나를 공들여 읽게 됐고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과 고민들이 보인다. 크게 보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일텐데 인생을 살아가며 구축한(혹은 구축된) 내 정체성이 있고(주로 그들은 유대인 이민자, 시골 출신의 도시생활자-지식인, 전문가-로서 본래의 정체성을 자/타의적으로 버리고 살아가면서 실은 버리지 못한 채로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런 삶에 균열이 가는 어떤 사건이 생기고, 앞서 말했듯이 나라는 스스로의 환상에 대한 청구서를 받아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인다.
++) 물론 여기에서도 미국의 유대인들이 대체로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서-법률 전문가, 잡지사 임원 등- 머리에 든게 많아 (이것땜에 대화 중에 고급 배경지식이 많이 나와서 '얘네 뭔 소리 하는 거?' 하고 독자로서 소외되기 쉬움) 그렇지만 그런 지식들은 인물들이 겪는 어떤 무너짐을 막아주진 못한다^^
'사촌들'로 다시 돌아와서, 사촌들은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어 사촌아.. 너 그 판사랑 친하지? (30년 전에 한두번 봤을뿐;) 내 동생 이번에 들어가면 진짜..하.. 니가 편지좀 잘 써서 형기 좀 줄여줄 수 있을까? (난감;… 그래 사촌 부모님들이 이민자인 우리 가족을 잘 봐주셨었지…)
------어어 사촌아.. 접땐 고마워.. 동생이 좀더 좋은 깜빵으로 갈 수 있을까? 한번만 더 힘써줘 (하아... 흠 그래 그녀석 날 별볼일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었지. 한번 더 나의 힘을 보여줄까…)
그리하여 ‘판사님께’로 시작하는 편지 쓰기의 기술… 이 아니라 왜 법조인인 자신이 사촌을 위해 탄원서를 쓰게 되는지, 그 일을 시작으로 다른 사촌들과도 연결되어 옛 기억을 저버리지 못하고 도움을 주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 혈연이란 무엇인가? 미국에 이민온 유대인 가족은 단순한 친척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그들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짐이 된다. (한국의 가족과 크게 다를바 없는 것 같음) 특히 가족 중에서 잘 나간다고 여겨지는 누군가는 짐을 더 크게 지게 된다. 사실 우리집만 해도 잘 나가는 게 아니라 나머지 가족들이 못 나가는 건데 모두 한 사람에게 의지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랐던... 그런 과거의 번잡한 일들을 떠올리자니 '사촌들'에 매우 공감이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내내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자니, 혼잣말로 '울타리는 보호막이자 한계가 될 수 있다'고 되뇌고 있다. 여기서도 울타리를 넘어 가족들과 연 다 끊고 혼자서 살아가는 사촌이 있는 반면 나는 어릴적 가족에 대한 작은 기억(순수한, 더럽혀지지 않은, 계산적이지 않은)들을 놓지 못하고 먼 친척을 도우려 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 사촌은 옛 기억 속의 그가 아니다. 난 누굴 도우려고 한 것인가? 내 기억을 위해?
‘내가 편지를 쓴 건 그 친척들이 내 기억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이런 부탁을 받는다면, 아니, 가까운 예를 들어 내가 그 직업이라고 해서 가족으로부터 부담받은 여러 일들을 생각해보면 머리가 지끈해지면서도 마음이 짠해진다. 아주 애환이 담긴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__- 다음으로 넘어가자.
다음으로 '어떤 도둑질'을 얘기하고 싶다.
그나마 단편들 중에 가장 후루룩 읽은 작품이다.
네 번 결혼했고 현재 무능한 남편과 살며 패션계 편집자로서 성공한 클라라의 이야기. 클라라에게는 네 번의 결혼보다 소중한,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한 이상적인 전남친 이시얼이 있고 그와는 결혼이 무산된 후로도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데 그는 클라라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다. 그런 그가 준 에메랄드 반지가 도둑맞았다. 집안에서.
전편에 그려진 여성 인물들처럼 여기 나오는 클라라도 큰 체격에 강인한 기운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아마 작가가 보아온 개척시대 이민자 여성의 이미지인 것 같다) 시골 출신이지만, 시골 출신임이 숨겨지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뉴욕 여성’이고 그녀 스스로도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반지를 도둑맞고 정신적으로 무너진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은 집안의 가정교사인 외국인 여학생을 다그치고 내쫓는 상황을 만듦으로서 본인 스스로 혼란스러워한다. ‘반지가 뭐라고…’
그래, 그 반지가 뭐라고, 에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 같다.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그 반지가 두 번이나 없어졌었고 두 번이나 다시 돌아왔다. 두 번째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녀는 무너진다. 한번 죽는다고 표현해야할까? 클라라가 진짜 잃어버린 건 뭘까. 거기부터 새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만들어서 잇고 싶은데 지금은 공력이 딸린다. 한 10년후라면 클라라와 '위 꼬넥띵'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 단편들에도-벨라로사 커넥션 특히... (나만 무슨 얘긴지 못 알아들음?) 같은 묘사가 더러 있지만 적당히 모른채 봐도 괜찮은 이야기들이었다.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이야기. 낯설어서 다시 읽는 게 아니라 한번 읽고서도 다시 한번 되돌아가 읽어보게 되는 이야기들이었고 한 열 살 쯤 더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현대문학 서평단으로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