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춘향이와 이몽룡, 향단이와 방자가 나오는 <춘향전>. 예전에 <홍길동전>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만 생각해 보니 <춘향전>도 책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싶어 중고서점 갔다가 냉큼 집어왔다.
책에는 2편의 춘향전이 실려 있다. 하나는 배경이 숙종 시대, 다른 하나는 인조 시대로 되어있다.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약간씩 다르지만, 나머지 설정은 비슷비슷하다.
춘향이는 올해 십육 세 된 남원 기생의 딸이다. 기생의 딸이나 기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은, 기생이 아닌 평범한 규수다. 그냥 규수가 아니라 예쁘기로는 소문난 규수다. 게다가 당시 고전을 두루 익히고 응용까지 할 줄 아는 배운 여자다.
이몽룡은 남원 사또의 아들로, 춘향이와 동갑이다. 인물이 빼어나고 지혜롭고 문장력도 좋은 데다 글씨까지 잘 쓴단다. 둘 다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들이다.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학문에 정진하고, 춘향도 춘향 나름대로 책도 보고 바느질도 익히고 당시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지내고 있다가 운명처럼 마주친다. 먼저 반한 건 역시 이몽룡이다. 단옷날 좋은 계절에 그네 타는 춘향이를 보고 한 마디로 "뿅 간" 그는 그날로 춘향이와 춘향이 모친에게 구애를 한다. 그러나 국법이 지엄하다. 장가도 안 간 양반의 자제가 첩부 터 들인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이몽룡은 진심이다. 둘은 그날부터 연인이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연인에게도 위기는 있는 법. 몽룡의 아버지가 서울로 부임하게 되면서 급하게 떠나게 되고 몽룡은 과거 급제 후 춘향을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바삐 떠난다. 춘향이는 그날부터 수절하기로 한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변 사또라는 양반이 오자마자 열 일 제쳐두고 기생부터 불러들이더니, 다짜고짜 춘향이를 찾는다. 춘향이는 기생의 딸이지 기생이 아니며 전임 사또의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래서 지금 몽룡을 기다리며 수절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도 안하무인이다. 벅벅 우겨 춘향을 끌고 와 수청을 강요하나, 춘향은 완고하다. 그러자 세상에 그런 수절이 어디 있냐며 춘향이를 몸이 상하게 고문한다. 자기의 수청을 들라고.
이런 이야기 하나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두 편의 춘향전을 읽으며 당대의 사람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게 뭔지는 알겠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신분제 사회에 대한 불만","여성의 정절 강조" 같은 것도 있었지만 "세상에 천한 여자도 이렇게 정절을 지키는데 남자라고 달라서야 될 쏘냐" 같은, 정치인으로서 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는 의도도 있었다.
꼴 보기 싫은 장면도 있었다. 두 번째 춘향전에서 춘향이 옥 중에 있을 때 지나가는 장님 점술사에게 점을 치기 위해 불러들이자 춘향을 더듬는 장면은, 그때 시각으로 봐서는 우스운 장치였을지 모르나 2019년을 사는 내 시각에서 보자면 명백한 성추행이며 지금 같았으면 '#미투' 같은 걸 달고 각종 SNS를 통해 확산 재확산 됐을 만한 추태로 보였다.
여하튼 이몽룡은 다행히 서울에서 장원 급제를 하고, 남원으로 암행을 오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 춘향의 소문을 듣고 현 남원 사또를 급습하기 전 날 춘향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미리 만나보기도 한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몽룡은 당연히 변 사또 급습에 성공하고, 수절을 지킨 춘향은 임금님께 '정렬부인' 칭호를 하사받고 몽룡도 승진하여 둘은 부부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내가 읽은 춘향전은 '어떤 상황에서도 할 말 다 하는 굳건한 심지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로 보인다. 사랑하는 남자는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수청만 들면 어쩌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 게다가 변 사또는 자기를 고문까지 하고 있다. 옥중에 큰 칼 차고 갇혀 어찌 될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에서도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을지 모른다'라며 꿋꿋하고, 매를 맞아 살이 터지고 선혈이 낭자한 데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상하게, 그리고 기개있게 다 하는 춘향이의 모습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절개 있게 보였다. 오 요고 봐라? 이 언니 할 말 다 하네. 그래 봐야 열여섯 살짜리가. 그 정도는 되어야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임금님께 "정렬부인" 칭호도 받고 양반가의 남자의 정부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나 보다. 재미는 있다. 해석 또한 읽는 사람 마음일 테고.
덧) 표지가 참 마음에 안 든다. 아무리 춘향전의 <사랑가>가 이야기의 절정이라고는 하나 그림이 뭐 이래? 그림의 구도 봐라. 몽룡이 뒤에서 옷을 벗기는 춘향의 옷 고름이 풀어진 모습에 눈이 가게 그려 놨다. 여성의 대상화는 이런 데서도 보인다. 어쩌자는 건지.

요즘 소설과는 다르게 구어체인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보이는 것이 다 춘향이라. 보고지고. 칠 년 큰 가뭄에 빗발같이 보고지고. 구 년 홍수에 햇빛 같이 보고지고. 달 없는 동쪽 하늘에 불 켠 듯이 보고지고.- P197
백옥 같은 다리에 솟아나는 것은 유혈이라. 보는 이 뉘 아니 가련히 여기리오?- P218
219
철석 같이 수절하는 춘향이 수청 아니 든다고 엄히 다스려 옥에 가두었지만 구관의 아들인지 개아들인지 한 번 떠난 후 내내 소식이 없으니 그런 소자식이 어디 있을까 보오?- P230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사주가 험악하여 일신이 난처한가? 빈부고락 들어보세."- P248
비록 장부라도 임금 섬기는 자는 반드시 두 마음 먹지 말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