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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거지 소녀'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작가가 헤어지기 전에 소개해준 작품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쩌다 왜 만나게 되었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시연과 딸아이에게는 그즘에 이미 발설하고 만 상태다. 가장 가까운 그들에게는 부끄러울 것도 수치스러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고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고 나의 실패에 비웃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래서 유머처럼 농담을 던지듯 그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했다. 나의 소설을 향한 절망이 무수한 망설임 끝에 그 작가를 만나는 길에 이르렀다는 걸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다. 그건 소설로 써도 짧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그 작가를 만난 일이 진짜 일화가 된다면 그 이야기는 에피소드로 내 작품에 등장할 것이다. 그 때에는 코믹스럽고 아이러니한 삽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곧 올 거라는 기대를 하며, 그가 너무나 좋은 작품이라고 찬사했던 이 작품의 리뷰를 쓴다.  정말 내 눈을 뜨악, 뜨게 한 소설이었다. 그에게 심심한 감사의 마음조차 생겨나는 소설집이다.


장엄한 매질

   새엄마의 고자질로 아버지에게 로즈는 매질을 당한다. 아버지는 벨트를 풀어 딸을 응징한다. 그의 매질은 아내의 편에 서야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을 때리는 일에 진심인 것 같다. 혐오와 분노가 눈에 서리고 일종의 쾌락이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다. 

  로즈는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매질은 어떤 형식을 띠고 진행된 것이다.  아버지와 딸과 새엄마는 자신들이 맡은 연기를 한 것이다. 새엄마 플로는 지나친 폭력을 행한 남편을 비난하고 로즈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플로는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를 정성껏 차려 로즈의 침대 맡에 놓고 계단을 내려간다. 한참 후, 로즈는 그 샌드위치를 먹는다. 세 식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어색함을 감추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어낸다. 

  제목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한 가족이 벌이는 이 장엄한 매질은 단순히 교육용 폭력이나 미움이 만들어낸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 매뉴얼화된 이 집안 특유의 가족간의 관계 때문에 생겨난 의식 같았다.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와 삐꼬는 작가의 솜씨가 멋지게 탁월하다. 


특권

  오래전 시골에 가면 언제나 추문과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번번이 들려오곤 했다. 아마도 앨리스 먼로가 살았던 캐나다의 시골 마을 온타리오주 윙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 이 작품의 주요 소재가 아닐까 싶다. 남학생 변소와 여학생 변소, 변소에 들어간 노인 번스 씨, 남매인 쇼티 맥길과 프래니 맥길의 잔혹한 이야기. 이렇게 잔혹하고 더럽고 원시적인 마을과 학교에서 로즈는 성장한다. 코라라는 같은 또래의 소녀를 동경하고 호감하는데, 그러나 코라는 결국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좀 성숙하기만 했던 시골 여자아이에 지나지 않았음이 얼마 안가 드러난다.

  전쟁이 나면서 이 가난하고 원시적인 마을은 새 문명으로 탈바꿈하고 지저분한 것들은 어느새 사라진다. 이제 로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래서 "그녀는 마치 여왕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어린 시절의 다양한 추문과 지저분한 얘기들을 그들에게 들려주곤 했"다고, 작품 첫머리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평범하게 잘 자란, 부르주아적인 사람들에게 그녀는 특권적인 화젯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자몽 반 개

  로즈는 자라서 다리를 건너 시내의 고등학교에 다닌다. 시내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은 생활방식이 다른데, 로즈는 아침을 어떻게 먹느냐는 물음에(가정생활 과목 시간) "자몽 반 개"라고 대답한다. 시골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루비 캐루서스라는 빨간 머리에 사시가 심하고 문란한 여학생이 등장한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일을 벌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시골이나 변두리 마을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또 로즈의 새엄마 플로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모든 것이 시골 마을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살았던 포천이나 변두리인 싸릿말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비윤리적인 일들이 늘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재에는 제한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소재를 만나도 작가의 사유와 상상력은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현재의 독자에게 말할 수만 있다면 소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이 소설집이 증명해준다. 


야생 백조

  로즈가 처음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가던 중에 옆에 앉은 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이야기가 놀랍게 펼쳐진다. 목사는 진짜 목사였을까, 그는 목회자의 까운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목회자였을지도 모른다. 하나 내용의 백미는 로즈가 차츰 그의 추행에 의도적으로 반발하지 않고 그를 제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수치였다. 비루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순간에 자문한다. 해될 게 뭔가, 우리가 탐욕이 일으킨, 탐욕스러운 승인이 일으킨 차가운 파도를 타고 있는 동안에, 나쁜면 나쁠수록 좋은 그것이 뭐가 되었든, 해될 게 뭐란 말인가."


거지 소녀

  패트릭 블래치퍼드와 로즈의 연애와 결혼, 이혼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 똑똑하지만 가난하고 진취적이지만 출구가 봉쇄된 로즈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지닌 가문의 패트릭을 만나 갈등하다 결혼을 하고 만다. 패트릭은그런 그녀에게 거지소녀라는 낭만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둘의 결별은 정해진 순서에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 로즈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후회라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장난질

  이 단편부터는 어른이 된, 이혼을 한 후의 로즈의 사생활이 중심으로 펼쳐진다. 친구의 남편과 잠시 사랑했던 순간이 지나고 로즈는 그들 부부와 함께 밤을 보낸다. 셋이서 하는 정사라니....


섭리

  사랑하는 남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는 다시는 로즈에게 오지 않는다. 사랑은 진실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으로 인해 중단되고 실패한다. 그리고 로즈는 결국 그것은 섭리였다는 걸.


사이먼의 행운

  '섭리'와 아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이먼과의 어긋난 사랑 때문에 로즈의 앞날이 뜻하지 않게 다른 도시에서 성공하는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불행이 행운을 아무도 모르게 가져다주는, 쉽게 셈할 수 없는 삶의 다층적인 면이 오랜 세월 후에 드러난다. 


스펠링

  플로를 양로원에 데려다주기 위해 먼저 답사하는 로즈가 보게되는 장면이 스펠링의 모티브다. 스펠링을 읽고 그 뜻을 암기하는 양로원 노인, 플로는 양로원에서 일생을 마감할 것이다. 마음이 가장 아픈 단편이었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동네의 공식적인 지체장애자인 밀턴 호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또 로즈와 같은 동기인 랠프 길레스피도 등장하는데, 추억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우수와 그리움 같은 걸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로즈가 중년에 다시 찾은 핸래티에서 어린 시절 친구 랠프를 만나 비로소 자기와 닮은 영혼을 찾았다고 느끼는 것도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화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마지막 결말이(해설에서) 이 제목을 멀리에서 찾은 상징인 것 같다. 



전에 먼로의 작품집을 두 권 읽었는데 그때는 그냥 수많은 작가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이 '거지소녀'를 읽으며 먼로가 왜 단편소설의 거장인지, 왜 그녀에게 노벨문학상을 주었는지 확실히 이해되었다. 여기의 이야기들은 가난하게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수치와 열패감 따위의 감정들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느 소설보다 마음에 각인되고 공감하게 된다, 저절로. 정말 훌륭한 작품을 읽었고, 내게도 쓸 이야기들이 많다는 확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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