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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의 서재



  과제로 받은 단편을 읽었다. 밑줄을 긋고 천천히 두 번씩.

  황정은의 문장은 깔끔하고 정갈하면서도 보여주어야 할 것은 꼭 보여준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글이라고, 늘 생각하게 된다. 

  이기호의 <권순찬과...>는 실제로 있을 법한 서사여서 재미있었다. 잔잔한 이야기가 삶의 모순과 사회적 부조리를 담고, 생의 비루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따듯한 마음씀이 느껴진다. 주제 또한 아주 명료하게 살아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양의 미래...황정은

 

 '양'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양'은 진주와 나를,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아이도 아닌 채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여자아이들을 가리키고 있다, 분명히. 그리고 중의적 다른 의미로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속죄물(번죄물)로써의 양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 나와 진주는 제물로써의 '양'과 같은 '양'(예전에는 여자 신입사원이나 젊은 여자 대부분에게 '양'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일까. 권위와 권력, 부와 명예, 힘과 능력, 학벌과 환경에서 전무하고 초라한, 가난한 여자아이들이 겪게 되는 수치와 위험이 언제나 일상에서, 어느 세대보다 확연히 크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여자아이들을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도구가 될 때 여자아이는 단순히 인격적인 부분만 훼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학대나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다. 그걸 감당하고 싶은 인간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과 가난은 여자아이에게 너무나 쉽게 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만든다. 소년보다 소녀가 훨씬 더 도구로써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고 평생에 걸친 상해를 입을 확률이 높다.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진 '진주'를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진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정의란, 평등이란, 공평함이란  이사회에 없다. 그런 윤리와 덕목이 있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양지에 인간들이 모여있을 때나 작동한다. 어두운 그늘 뒤에는, 무언가의 그림자 뒤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희생자들이(제물)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는 존재로써가 아니라 비존재처럼 존재한다. 그러니 존재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모순적이다. 그들은 비존재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성인남자, 성인여자, 소년, 노인, 아이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마 가난하고 못 배운 소녀일 것이다. 

  작가는 그런 '양'이 다른 '양'을 못 본 척한 것을, 그리고 그녀가 평생 사라진 '양'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죄의식을 혼자 지고 살아야하는 삶을 그렸다. 


공간: 서점

주제: '양'들의 삶, 죄의식, 공평하지 않은 삶, 무엇도 소유할 수 없는 가난한 젊은이의 현실 등등

형식: 회상적

*서점에서 일했던 호재와 호재 뒤에 들어온 재오는 이름이 비슷하다. 그들의 삶이 비슷할 거라는 추측을 만들어낸다. 

*벚꽃잎이 바람에 뒤집어지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풍경이 진주가 사라진 사건을 비유하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표현: 남성성이 거세된 것 같은, 통 말이 없는, 할머니 같다는, 이런 표현들은 중년의 무능하고 무기력한 남성에 대한 표현으로써 적절하고 탁월하다. 슬픔까지 아우르는 문장들.

*고양이를 돌보아주는 호재는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한참 부족하다. 호재와 나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능력없는 두 사람이 함께 붙어있는 앞날은 자명하기 때문에

*나는 '양'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일을 간혹 당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그것에 정면대응하지 않고 말없이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끝낸다. 

*진주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덜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비율이 축소된 인간"이라고. 인간의 외모가 얼마나 정확하게 가난을 보여주는지(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사기적인 캐릭터도 많지만), 보여주었다. 작가의 사유가 섬세하고 날카롭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기호


  현 시점에서 바로 얼마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나' 가 겪은 이야기이다. 마른장마가 이 주 이상 계속 되고 있던 7월 초순부터 첫눈이 내리고 며칠 뒤 12월에 접어든 시기까지, 6개월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그 이상한 남자'가 계속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에 천막을 치고 대자보를 합판에 붙여 손에 든 채로 등장한다.

  남자는 권순찬이고 나의 눈에 그는 '먼지 뭉치'처럼 보인다. "유리창에 덧댄 패널처럼, 힘없이 날리는 눈송이처럼" 보인다. 그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서서히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무언가 도움이 되려 한다. 이방인인 권순찬을 둘러싼 아파트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보통의 서민들은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권순찬이 아니더라도 분명 착한 사람들이 많다. 각자 사연은 다르고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넓게 보아서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의 일에 마구 나서지는 않지만 가엾은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동정하고 조금이라도 뭔가 나누려한다. 

  그런데 나는 "알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 일 년 넘게 소설 한 편, 에세이 한 편 쓰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꾸 화가 난다. 화의 이유를 모르겠고 얼마 전에는 별일도 아닌 일에 교무부처장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화를 낼까 조심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권순찬에게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된다. 정말 실제로 엮인 것은 아니고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이 엮이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무력증에 빠져 있던 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권순찬에 대한 글을 쓰게 되는데...

  그러나 나가 정말 글을 쓰게 된 연유는 권순찬 때문이 아니라 권순찬이 피해를 입은(실제는 권순찬의 새어머니가) 사채업자 김석만의 출현 때문이었다. 이런 아이러니!!

  "나는 원래 그의 이야기를 쓸 마음은 갖고 있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그의 이야기를 썼다. 그건 지지난주 금요일,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내가 만난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김석만. 쿠페형 외제차를 몰고 몇 년 만에 어머니집에 쇼핑백을 들고 나타난 남자는 칼라에 흰털이 달린 가죽재킷을 입고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애꿎은 사람들에게밖에 화를 내지 못한다. 정말 화를 내야할 곳을 안다해도 그것은(?)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거니와 아주 쉽사리 내게 보복을 가할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것의 기세에 눌려있어, 그것의 권력 앞에 너무 약하기 때문에 화를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더 기고만장하고 윤택하게 살면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니 애꿎은 것들끼리 애꿎은 것들에게만 화를 내게 된다. 약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얕보고 화를 내고 화풀이를 한다. 약한 자들은 각성할 일이다. 약한 자들은 강해질 필요가, 그래서 있다. 자신을 돌아보고 누가 정말 가해자이고 악한 자들인지 성찰해 볼 일이다. 

  이기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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