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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코루님의 서재
  • 잠든 나의 얼굴을
  • 임수지
  • 15,300원 (10%850)
  • 2025-11-07
  • : 2,045

임수지 작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을 읽었다. 첫 페이지부터 한창 읽고 있던 소설의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금방 몰입이 되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진의 1인칭 시점이라 이야기의 흐름을 쫓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순간 독자로 하여금 성인이 된 나진이 스노보드를 타러 떠난 고모를 대신해 뇌출혈을 이겨낸 할머니를 돌보는 모습으로,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이혼으로 조부모 집에 맡겨진 어린 시절의 나진과 학교 생활에 적응해나가며 경은이라는 평생의 친구를 만난 모습으로 순식간에 감정이입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나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 집을 떠나 서울 대학의 기숙사로 짐을 옮기는 차 안에서 아빠는 딸에게 여러가지 잔소리를 하며 "이제 네 인생은 네 힘으로 사는 거야.(276)"라는 말을 건넨다. 아마도 엄마랑 이혼하고 돈을 번다는 이유로 딸을 조부모에 맡긴 아빠에 대한 서운함으로 인해 나진은 "무슨 소리야? 이제껏 내 힘으로 살아왔는데?"라고 반문을 하지만, 아빠는 "네가 무슨 네 힘으로 살아. 아빠에 할아버지에 할머니, 다 그 품에서 살았지."라고 답해 나진을 할 말 없게 만든다. 맞는 말 같다는 나진의 고백처럼 사실 따지고보면 나진이 보고픈 엄마를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속에서 살았지만, 조금은 무뚝뚝한 조부모의 품 안에서 안정된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객관적인 불행의 수치를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진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에서 비롯된 것처럼 어딘가 항상 주눅이 든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겉모습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엄마의 결핍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진이 처음으로 집에 친구 경은을 데리고 오자 할머니는 낙지까지 넣은 떡볶이를 만들어주며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지만, 걱실거리는 경은에게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며 나진은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고, 할머니는 내심 내 자식들은 왜 그렇게 다들 한결같이 말도 없고 무뚝뚝한 것일까 아쉬워했을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와 미용실에서 일하는 경은은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광주로 내려온 나진의 연락을 받고 또 얼마나 머리가 한심한 꼴일지 의심하며 관리를 제대로 안하는 나진을 혼내려 한다. 나진은 응근 경은에게 혼나는 것을 고대하며 싼 커피를 사오라는 말에 한 잔에 칠천원이 넘는 드립 커피를 받아 손이 곱아드는 추위를 감내하며 경은의 미용실을 방문한다. 


엄마의 부재, 아빠의 무관심, 조부모의 무뚝뚝함, 그리고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 같은 삶을 사는 고모의 존재 속에서 사춘기를 보낸 나진에게 경은이라는 친구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하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래 친구와 마음을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친밀함은 쉽게 내색하지 않는 조부모의 안정된 품에서 얻을 수 없었던 애정의 갈급함을 충만히 대체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나진은 엇나가지 않고 한 명의 몫을 해내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어느 일요일의 아침은 당시에 꽤나 쓸쓸했던 나의 마음을 한동안 어루만져 주었다. 아주 가깝게 지내던 중학교 몇 년이 지나 고등학교 진학하며 집도 학교도 거리상 꽤나 멀어졌다. 예전처럼 하루가 멀게 만나 시시덕거릴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한없이 부족하여 일요일에도 특별반 수업을 받으러 학교를 가던 친구가 내가 살던 집을 지나쳐 가야 하기에 중간에 하차하여 불과 20-30분 짧은 만남을 갖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사이가 성인이 되고 각자의 길을 가다보니 이제는 거의 연락이 끊긴 것처럼 번호만 저장되어 있다.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만 소설 속 나진과 경은의 모습처럼 친구가 절실했던 시기에 서로를 잘 지탱할 수 있도록 내어준 우정에 감사함이 더 크다. 


성인이 된 나진이 고모의 연락 두절에도 불안해하지 않고 묵묵히 할머니를 돌보는 3주간의 시간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준비하게 해 준다. 오래된 짐이 쟁여져 켜켜이 쌓인 먼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발견한 할머니 주름진 귀는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닫게 한다. 시간의 영속성에 반해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지만, 나진이 경은과 붕어빵을 먹으며 배웅하는 순간과 텔레비전을 보며 누워있는 할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할머니 냄새를 애써 기억하려는 순간은 나진의 삶 속에 영원히 박제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지 않아? 좋을 때는 느리게, 견디기 버거울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늘 바라왔으나 시간의 속도는 그 반대로만 흘렀다. 할머니는 지금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나. 지금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나중에 뒤돌아보면 오늘은 너무나 뒤에, 점에 가까울 만큼 뒤에 있을 것이다.(255-256)"


#임수지 #잠든나의얼굴을 #제2회아르떼문학상수상작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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