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 [절창]을 읽었다. 구병의 작가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느꼈던 단어 선택에 대한 탁월함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국어사전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완독이 불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다다른다. 그래도 꽤나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아무리 한자어라 해도 뜻이 어렴풋이도 전혀 짐작되지 않는 말을 접하게 될 때는 저자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저자가 이렇게 난해한 단어들을 한 문장에 두 세개씩 나열되는 것을 보고 유식함을 과장되어 드러내기 위함이다, 혹은 이런 불필요한 미사여구들이 장황하게 반복되어 읽기를 방해한다는 손쉬운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을 되새기며 문장에 담긴 속뜻을 헤어려보느라 읽기가 중단되고 맥이 끊기는 것이 저자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이 소설에서 핵심을 가로지르는 정황은 문오언와 아가씨로 호명되는 소녀와의 관계를 염두해둘 때 입으로 드러나는 말로서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오독이 반복되는 세상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멈춰서 가만히 헤아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힘주어 선택한 단어들의 뜻을 헤아려보며 멈춰설 때 독자는 문오와 소녀가 도달하고자 하는 불완전한 사랑의 귀결점에 조금씩 스며들어가게 된다. 그런 면에서 피와 상처가 난무하는 잔혹한 상황과는 대척되는 뜻밖의 비유에 속한 단어들의 행진은 여느 소설보다 더 느리도록 책 읽기에 브레이크를 걸게 함으로써 작품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아이러니의 장치를 제대로 매설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이런 단어가 주는 힘과 더불어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온 대사들이 인용되는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다. 피가 흐르는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이 숨기고자 하는 것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녀와 어느 대단한 집안의 떳떳하지 못한 태생으로 불법적인 일을 지속해 온 오언의 만남이 소설의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화자라 할 수 있는 소녀의 상주교사로 발탁된 중년 여성의 시선이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소녀가 화자에게 자신이 살아온 지난 날을 고백하는 쳅터를 제외하고는 화자인 상주교사가 누군가에게 문오를 만난 이후부터의 시간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것으로 보이도록 경어체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소설 전체가 상주교사인 여성의 눈으로 보인 장면들을 나열하는 경어체로 진행된 이유가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위한 킥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오언의 말처럼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보통 분 아닌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요.(328)"라는 찐득한 긴장감을 갖게 된다. 물론 소설이기에 그리고 오언이 해왔던 불법적인 일의 크기와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기에, 이야기의 첫머리부터 나오는 입을 열게 만들도록 허벅지에 칼을 꽂는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오언에 대한 혐오스러움이 아닌 연민에서 비롯된 그럴만한 이유와 정황을 찾게 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라 억지로 타당성을 찾아보자면 오언이 린치를 가하며 피를 내뿜게 만드는 상처를 드러내는 이들 또한 정의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니며 순간의 이익을 쫓아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비열한 이들로 비춰지기 때문이라면 너무나도 기울어진 읽기일까? 조금 더 오언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자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생계의 위협을 받는 소녀의 몸을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소녀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도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오언의 행동은 자해를 하면서까지 소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온전히 읽어주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의 깊이가 있기에 애써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말을 내뱉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내뱉은 수많은 말들이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왜곡된 시선으로 실망감을 불러일으키는 자멸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댄들 이미 입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 없기에 이미 한 번 깊이 베어버린 상처의 말은 상대방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박혀 그 무엇으로도 낭자해진 피를 멈추게 만들 수 없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오언은 소녀가 부모에게 버림받아 원에서 자란 것처럼 자신 또한 떳떳하지 못한 출생의 신분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기에 1초도 안되 뱉어버릴 수 있는 쉬운 말이 어떤 또 다른 절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언은 소녀에게 말로서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소녀가 원한다고 말할 때까지 손을 맞잡을 때까지 기다린다. 하지만 소녀의 기타 선생님이었던 이가 사실은 소녀를 구출하고 오언을 잡기 위해 잠입한 어떤 특정 기관의 요원이었음이 발각되고, 소녀의 간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기타 선생님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분노에 사로잡힌 소녀는 오언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어버릴 때까지, 필요하다면 세상 모든 인간을 읽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만은 절대로 안 읽어.(268)"
오언의 불행한 결말은 소녀의 이 매정한 말로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오언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깨진 컵으로 손에 피가 철철 흘려내려도, 유리조각으로 그러진 쇄골이 흰 셔츠를 붉게 물들여도 그 상처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던 소녀가 통상적인 교통 사고의 반작용과는 반대로 핸들을 꺾어 소녀를 지켜내며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오언의 마음을 마침내 읽어내게 된다. 죽음의 선택만이 소녀에게 온전히 자신을 읽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오언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람직하지 않음이든 재미없음이든 간에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아해한다는 것, 상대방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동음이의어나 관용구, 나아가 표정이나 억양으로도 의미가 전혀 달라질 수 있고, 거듭된 곡해 속에 난파된 말들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뗏목의 파편 하나를 발견하여 올라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사람 사이, 즉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사람 사이로 범람하는 급류 한가운데 놓인 다리의 안정성과 길이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다리가 끊어졌거나 애초에 다리 따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를 건너서 다가가야 할 때도 있고 채워야 할 때도 있는 한편 그것이 사이임을 모르는 채 사이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란 파헤치고 들쑤시는 방식으로만 좁히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서로의 사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암실 속에서 서로를 보고 듣고 헤아린다는 착각과 함께 살아가는 유기체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63-64)"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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