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작가의 [오직 그녀의 것]을 읽었다. 서점을 갈 때마다 매순간 놀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이렇게 매일 신간이 쏟아져나오는 것인가이다. 아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은 반대로 늘어나는 것인지? 출판계가 호황이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책을 내서 때돈을 버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내게 맞는 책, 또는 내게 필요한 책을 선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예고편을 보고 어느 정도 감이 오면 좋을텐데 띠지에 씌인 문구나 미리보기 몇 페이지만 읽고 나서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그냥 무작정 책을 사들이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먼지만 쌓이게 한 책도 꽤나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홍석주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은 지금보다 몇 십년 전으로 석주가 대학을 다닐 때에 학생 운동이 정점이 아니지만 여전히 데모가 지속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 사용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전동타자기를 쓴다던지, 손으로 필사를 하는 장면들은 지금과는 사뭇다른 아날로그 시대의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저작권과 관련된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관습이나 도서정가제가 실행되지 않아 도매급으로 책이 팔리던 때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석주를 비롯한 출판계에 일생을 투신한 이들의 책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또 얼마나 다양한 신간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와의 만남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체감이 된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북토크가 열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작가의 이야기를 귀담에 듣는다. 소설 속에서도 석주의 회사 산티아고북스에서 발행한 여행 에세이의 북토크가 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석주는 그 여행 에세이가 별로 탐탁지 않았고 북토크에 참석한 독자가 친구의 죽음 이후 그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너무나도 사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의아함을 갖는다. 하지만 곧 석주는 책이란 저자의 생각과 경험만을 전하는 저자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몇몇 사람이 손을 들고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 감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책에 표정을 더하고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독자들의 내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완성되어가는 듯했다.
행사가 끝났을 때 석주는 그 책 [내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 완전히 다른 책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거의 매일 독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지금껏 진지하게 독자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책이므로 성패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했는지도.(187)"
북토크에 몇번 참석해보고 나니 석주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단순히 나 혼자 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저자를 중심으로 편집자가 사회를 보거나 또 다른 작가가 사회를 보면서 그 책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감상이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도록 이끄는 분위기가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을 길게 만들어주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바랐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형 출판사의 교열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석주는 굉장히 소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보인다.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20대 초반의 새내기 직장인은 이미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였던 숙달된 상사의 지시와 호된 질책을 무던히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수용의 자세를 보여준다. 석주가 살았던 시대의 엄격한 상하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여타의 직장인들을 다룬 소설에서 반복된 상사에 대한 불만과 불합리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했던 피곤함에서 벗어나 성실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후배를 적정한 선에서 배려하고 가르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읽는 내내 마음이 밝아졌다.
석주는 성실한 사수들을 만나 제대로 일을 배웠지만 갑작스러운 회사의 구조 조정에서 밀려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고 석주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산티아고북스에서의 일상이 시작된다. 편집부의 대리부터 시작하여 어느덧 은퇴를 앞둔 주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석주가 보여준 성실함과 인내는 책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읽고 또 읽고 수정할 부분을 엄선하고 개선될 방향을 모색하고 저자와 수없이 오갔을 연락과 어느 정도의 양보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을 타협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석주는 묵묵히 살아낸다. 사랑하는 원호와의 결혼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저자와 국가의 통제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석주와 원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발생된다.
사실 석주가 맏딸로서 중식당을 운영하며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 자라 안정된 교사라는 직업을 기대했던 부모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과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찾아뵈었던 원호의 부모가 결혼하고 나면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원호의 뒷바라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낙담함을 느끼는 장면은 그녀가 결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석주는 다소곳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평범한 삶을 포기할 만큼 용감했다. 석주가 편집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원호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 수 있었던 것은 첫 직장에서부터 아주 오랜시간 한 글자 한 글자가 이어져 책 한권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귀중하게 여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석주의 변화와 단단함은 평범해서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깊이 있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석주의 하루는 이른 아침 원룸을 나서면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시작되었고 저녁 무렵 같은 풍경을 되짚어 오면서 끝이 났다. 멀리서 보면 단조로워서 똑같은 하루를 이어붙인 것 같은 나날,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리 새로웠다. 조마조마하고 필사적인 마음 사이로, 이상한 기대감과 설렘 사이로 속절없이 흩어지는 시간은 너무 빨라서 모두 기억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으나 석주를 그 일상의 진짜 주인으로 만들었다.(115)"
"어린 시절, 석주는 사랑을 정념, 충동, 정열과 같은 단어로 이해했다. 운명에 의해 선택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무엇. 다른 모든 것을 단번에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엇. 석주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은 극적이기보다 안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건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211)"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른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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