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윤 작가의 [꽤 낙천적인 아이]를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50번째 작품이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경계를 너무나도 쉽게 넘어서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너무나도 재미 있다는 것이다. 대체 이런 형식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누구일지 궁금해지고 저자의 현재 직업이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책머리의 소개에는 순간 헉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스탠드업 코미디가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공연장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고학력 개그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의 작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전적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주인공 원소윤의 삶은 나이와 시대를 떠나 우리 삶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희극과 비극의 순간들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와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저자의 이름과 같고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내용도 동일하기에 작가의 실제적 경험담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소설의 시작은 유서깊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그려져 앞으로 펼쳐질 내용 또한 종교와 관련된 일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소윤의 할아버지가 치릴로, 할머니가 소피아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로무알도와 로무알다라는 세례명을 갖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비극을 견디고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고통을 뜻하는 참척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참혹하고 슬픈 감정을 애둘러 표현한 이 한자말을 접하고 나서는 부모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따로 표현하는 말이 생겨났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어린 자식을 병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어린 아기의 무덤을 부모가 알지 못하게 봉분도 만들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은 누구나 오가며 밟을 수 있도록 봉분 없이 묻는 풍습이 있었다. 천하의 불효자식이니 단죄해야 한다는 발상에 근거하여. ~~ 친척 어른들은 아기의 묫자리를 부모가 알아선 안 된다며 두 사람이 장지에 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없었던 일로 치고 빨리 잊으라고, 매일 찾아가서 울고불고하지 말라고. 천하의 바보들, 봉분 좀 안 쌓는다고 그게 없었던 일이 되겠나. 하여튼 그때나 지금이나 잊고 말고에 대해 오지랖 떠는 인간들만큼 한심한 부류도 또 없다.(100)"
소윤은 아기가 떠난 시점이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에 오빠의 부재로 인한 기나긴 공허함을 알 수 없을 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견뎌냈을 그 지난한 고통의 시간을 상상과 공감으로 진득하게 마주한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기함을 금치 못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채널을 돌리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금방 잊게 된다. 때로는 그런 비극이 행여나 자신에게도 전염될까 싶어 후다닥 도망가기도 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참으로 어이없게도 너무나도 갑자기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생겨난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급체해서 속에 있는 것을 토해내듯이 울분을 터트린다. 신파의 클리세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라는 자아성찰과 고백이 이어진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간절한 기도를 바치게 되고, 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만일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선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하고 견디는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아 이게 삶의 우연성이구나" 언제가 어느 작가의 에세이에서 자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여인에게 이런 독설을 날리는 내용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당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죠?" 처음 그 말을 읽었을 때에는 아니 대체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다 있을까 불같이 화가 났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 그 독설의 말을 들은 여인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마음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의 순간들은 예기치 못하게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위로를 해왔던 시간들을 단숨에 돌아볼 수 있도록 우연히 극도의 고통이 벌어진다.
소윤은 제목의 [꽤 낙천적인 아이]처럼 고시원에서의 삶도, 재계약이 어어지지 않아 퇴사하는 일도, 갑작스러운 엄마의 낙상 사고로 간병을 하는 시간도 기꺼이 마주하며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인다. 억겹의 슬픔이 다가오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치릴로, 소피아, 로무알도, 로무알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기쁨을 기쁨으로 누린다. 각박해진다는 말은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다는 것으로 다가온다. 감정의 동물이 몸과 마음으로 발산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주인공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며 시시껄렁한 개그를 던지고 무안해지는 공격을 받더라도 피식 웃게 되는 일을 선택한 것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꽤 낙천적이지 않고서는 참 살기 힘든 세상이기에 말이다.
"서툰 농담으로 주변을 썰렁하게 하던 코미디언이 한 사람 앞에 진담 같은 농담을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을 이 소설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성장이라면 가족의 슬픔, 운명의 횡포, 세상사의 표리부동, 서늘한 이별의 예감 속에서 비극을 증류해 희극을 얻고 희극을 제련해 유머를 빚는 과정은 이 소설의 내핵에 숨겨진 성장이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다. 성장하되 끝내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데에 이 소설의 백미가 있다. 함부로 성숙해지거나 자칫 철들지 않는 '나'는 한 손에 농담을, 한 손에 허구를 들고 세상을 향한 담대한 긁기를 시전한다. 두 팔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의 보폭처럼 씩씩한 속도로 스탠드업 코미디 서사의 빅뱅을 시작한다.- 박혜진 평론가 해설 중(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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