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름의 호흡을 가진다. 작가에 따라, 문체와 주제에 따라 책은 각기 다른 리듬을 가지고 숨을 쉰다. 이탈리아 문학의 경우 그 호흡이 영미권에 비해 조금 더 늦은 템포로 이어지는데,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느릿한 속도감과 함께 원어가 가지고 있었을 차분함, 정적, 차갑고 습기찬 호흡, 긴장과 고통으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빠트림 없이 전해온 것이 주기율표라는 책이다.
슬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딘가 남다르다. 그들은 눈빛으로 말하는 법을 알고 침묵으로 대화하는 법을 안다. 그들의 한숨은 단순한 실망이나 체념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체험담은 그 발화가 정신과 육체에 끼치는 강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이야기되기가 쉽지 않다. 그 사람들이 경험했던 비극에 세상을 향한 외침이 되게끔 힘있는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며 글을 쓰고 발표해온 사람이 바로 프리모 레비다. 그 자신이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이며 아우슈비츠의 증언자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주기율표는 그러한 삶을 살아온 레비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다루었던 전쟁과 수용소의 시간들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킨 시간축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순결함으로 가득했던 지나간 날들 속에는 미래를 꿈꾸고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향수하던 어린 시절의 그가 있었다. 소년 시절에 누렸던 자유와 우정, 눈부시게 푸르렀던 들판과 추위와 싸워가며 등반했던 높은 산들의 기억, 자연의 풍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 지적 성취와 자극들. 누구나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가 그이기에 남다르게 예민하고 깊은 감수성으로 감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의 기억 속의 실타래에서 풀려나오는 이야기들은 실망조차도 매끄러운 표면으로 미끄러지는 돌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을 경험한 뒤에 상처입은 채 살아남은 인간, 레비가 말하는 기억 위에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엷은 그리움과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안개처럼 드리워져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눈물만이 누락된 한결같은 애도 속에서 기억과 추억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