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곧잘 그 사태를 조망하는 지식인의 선언, 혹은 그 사태를 정리해서 입장과 논리를 만들어주는 저널리스트의
방송과 보도를 찾곤 한다. 그들이 내가 존경하는 지식인이고 내가 선호하는 당파의 저널리스트라면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사태와 관련된 모든 디테일을 확인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가 정말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자료와 차이가 나기는
할까? 우리는 귀찮이즘으로 인해서, 혹은 소명감이 없어서, 그리고 그 많은 자료를 찾아볼 엄두를 못낸다는 이유로 해서 우리의 판단 능력을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외기만 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들이 선택한 팩트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스토리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권위에 우리의 판단을 위임하고 신만이 진실을 말하리라고 믿었던
중세나 과학의 권위가 진리를 판단하도록 위임했던 근대의 사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소위 레거시 미디어라는 매체들을 행태를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다중의 판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위를 위임받았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다중지성이란 그저 세상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잠시 고개를 드는 몫 없는 자들의 아우성이란 말인가? 저들이 큰 자본을 들여 까판을 만들고 진실을 왜곡한다면 다중지성은 힘없이 무너질 수 있을까?
각자가 가슴에 품는 진실은 사회에서는 결정적인 사안이다. 까판을
사회 이론가 니클라스 루만의 방식으로 읽으면 1차질서 관찰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하겠다. 주관적 인식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까판에 뒤섞인 거짓과 진실
중에서 다중지성이 선택한 진실은 2차질서 관찰인 후속 소통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후속 소통에는 (소통장에 뛰어들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보장받는) 각자가 선택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택이라는
시간을 통과하여 진화라는 결과로 드러난다. 코로나 19 최초
경고자인 리원량은 권력의 입막음에도 불구하고 누명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안다.
그렇다면 다중지성이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글쓰기는 어쩌면 디테일까지 쫓아가서
진실을 증명하는 부지런함과 꾸준함의 글쓰기일 것이다. 그래서 동료 다중이 진실을 선택하고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증언혐오>는 탈-진실 시대의 다중지성에 호소하는 문체와 형식으로 구성된
저서다. 조정환은 추상적인 이론을 제시하기에 앞서 증언과 까판의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증명했으며
진리가 작동하고 작동하지 않는 현장을 제시했다. ‘까’판의
문법을 ‘깨’는 방식으로 설득해서 우리가 선택하게 하는 글쓰기를
제시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상황을 살피고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판단력으로 진화를 위한
선택을 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