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인을 결심한 건 그를 알게 된 지 이틀 만이었다."(9쪽)
소설은 이렇게 파격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함께 필라테스를 다니며 알게 된, 그리 교류가 깊지 않은 세 할머니가 차를 마시고 있던 카페에 행색이 초라하고 위급해 보이는 한 소녀가 달려와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독자를 단번에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소설 기법으로 예전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특히 등장인물들의 관점(POV:Point of View)으로 다양한 앵글로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이런 형식이 유행인 것 같아요. 독자 입장에서는 각자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따라 가며 이해하기가 쉽고 저자 입장에서는 잘만 활용하면 서술 트릭(저자와 독자의 정보 불균형을 이용한 트릭)을 구사할 수도 있으니 양쪽에 나쁘지 않은 기법인 듯합니다. 저는 대단히 선호하는 편이고 재미있게 읽은 영어 원서들 중 여러 권이 이런 형식이었어요.
이 소설에서는 메그, 대프니, 그레이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소녀 니나 이렇게 네 명의 관점으로 서술됩니다. 이들의 공동의 적은 인신매매와 매춘 알선, 폭력을 일삼는 두꺼비 같은 남자 팻이에요. 책의 뒷날개에 소개된 인물은 아래와 같습니다.
Beginner 1 메그
자기 그림자에도 놀라는 심약한 성격.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는 편. 런던 도심의 멋진 집에 살지만 왠지 시골 할머니 분위기를 풍김. 오랜 세월 자신을 학대한 남편이 마침내 죽었으나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고 있음
Beginner 2 대프니
컬러풀한 패션감각의 소유자. 다양한 걱정 전문가. 화려한 외양에 비해 소심하게 웃음.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예의를 지킴. 아시아인 모친과 백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
Beginner 3 그레이스
매사에 확실하고 자신감이 넘침. 고향 자메이카를 떠나 런던에 와서 교사로 일했음. 웃음소리가 호탕함. 교사 시절에 자신이 한 학생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늘 괴로워함.
The Target 두꺼비 남자
어린 여자들을 납치해 온갖 악생을 저지르는 죽어 마땅한 인간. 평범한 세 할머니가 살인 결심을 하게 될 정도로 아주 악질이며 무자비함
세 할머니가 주인공이라는 소개를 보고 몇 년 전에 나왔던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주인공인 유쾌하고 즐거운 코지 미스터리의 진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생각하며 당장 끌리기도 했고, 영국의 권위있는 미스터리상인 골드대거상 2022년 후보작이기도 하여 무척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코지 미스터리로 분류하거나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분류하기보다는 그 형식을 띤 페미니즘 소설, 혹은 노년여성들의 성장과 연대에 관한 서사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뒷부분에서 심장이 살짝 쫄깃해지는 면에서 스릴러 소설의 요소도 살짝 있다고 할 수 있고요. 코지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씁쓸하고 심각한 문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세 할머니가 여태까지 삶을 꾸려온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오는 그 모습이 인간은 언제까지나 성장할 수 있다는 찡한 감동도 줍니다.
각 등장인물의 관점으로 장을 구성하며 현재 사건의 진행과 함께 70평생을 살아온 각 사람의 속마음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런던 중심부에서 필라테스를 즐기는 유복하고 우아해 보이는 부인들이지만, 각자 기구하고 박복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메그는 남편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남편이 죽은 후에도 남편의 눈과 입을 늘 의식하기도 하고, 대프니는 대학 때 남들이 다 선망하고 동경하는 멋진 남자의 구애를 받았지만, 그 진실은 거의 매춘부로 취급하고 성병을 옮아 평생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레이스는 가장 현실적이고 똑똑해보이지만, 딸을 자메이카에 두고 돈을 벌러 왔다가 병으로 딸을 잃기도 했고 교사 시절 참사가 벌어질 강한 예감을 가지고도 막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었지. 지금이야 그 인간이 수차례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잘 몰랐어. 좋은 점만 보려고 했지. 어머니에게 매주 일요일마다 전화를 건다거나, 언젠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줬다거나, 그런 것들... 그후 깨달았지. ... 사람들에겐 좋은 점이 있다는 걸. 심지어 나쁜 사람에게도 말이야." (200쪽)
이런 그들에게 누가 봐도 성 착취를 당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숨이 넘어갈 듯한 다급한 모습으로 카페로 뛰어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소녀가 딸이라며 찾는 불쾌한 남성. 70평생을 살아온 이들은 이것만으로도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짐작합니다. 자신들의 불행했던 삶을 소녀에게 투사한 걸까요? 또 잘은 모르지만, 동류라는 것이 느껴지는 서로서로에게 연대감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이들은 진짜로 가족처럼 두꺼비 남자에게 쫓기는 니나를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마치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요. 하지만 이들은 책의 제목처럼 초보자입니다. 그리고 나름 고용한다고 고용한 청부 살인업자들도 어째 미덥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정의의 신이 이들의 선량함과 의로움의 편을 들어준 걸까요? 공공의 적인 두꺼비 남자를 처치하고 니나, 그리고 니나와 함께 매음굴에 있었던 니나 친구 로니를 구해냅니다.
이 과정에서 세 할머니는 여태까지 자신이 알던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신선함을 느낍니다. 그야말로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통쾌한 모습이죠.
여성이 억압받던 시절의 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얼얼하게 남기도 했고 아주 조금만 유머로 양념을 쳐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상처입은 작은 새 같지만 내면은 다부지고 총명한 소녀 니나를 통해 이들이 연대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