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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헌님의 서재
  • 내 안의 야곱 DNA
  • 김기현
  • 9,000원 (10%500)
  • 2011-02-22
  • : 251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에서 기존의 신을 위한 종교를 비판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기존의 종교에는 인간은 사라지고 오직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드 보통은 이러한 악습의 해결책을 인간을 위한 종교에서 찾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사라져버린 기존의 종교에 기대지 말고 인간을 위한 종교 만들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통은 지금까지 종교와 모든 것이 동일하지만, 신만이 사라져버린 종교를 탄생시키는 데 그것이 바로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단호히 기독교가 신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이 책의 저자도 동일하게 우리에게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서 안에 사람이 존재한고 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야곱을 통해 우리는 타자화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인 야곱이 찌질하기도 구리기도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야곱은 솔찬히도 매력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야곱의 삶이 성서의 결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서의 결론이자 세계관입니다. 성서는 은혜와 구원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서가 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마커스 보그는 “십자가 죽음은 예수의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살아낸 결과가 십자가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그의 이 주장은 한편으로는 발칙하지만, 일면 타당합니다. 조금만 신약성서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우리는 은혜, 구원만을 위한 삶이 성서의 지향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은혜와 구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잃어버린 드라크마, 즉 삶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방법을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이라는 터에 놓여 살아가라는 명을 받았지만, 이내 살아가는 방법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야곱이 등장하는 창세기에 멀리 떨어져있는 욥의 인생도 그랬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기도 했지만, 욥기 서사의 대부분에서 그는 하나님께 답을 내놓으라며 항변합니다. 의로운 본인이 왜 부당한 태도를 당해야 하냐며 하나님께 울분을 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러한 욥과 야곱을 기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하나님의 부르심 사이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부단히도 살아갔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간극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던 에서와는 다른 야곱의 삶을 만들지는 않았을까요? 스탠리 하우워스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간극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 간극 자체가 우리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야망을, 한편으로는 축복을 원했던” 야곱의 삶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에서처럼 장자라는 답에 안주하지도, 그렇다고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야곱처럼 굳건히 살아가야 합니다. 답이 없는 삶의 이정표는 ‘포기’가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답이 아닐까요? 야곱처럼 각자의 향기를 남기며 말입니다.
완주군 동상면 들어가는 입구에/ 저 밤나무숲이 무성하게 풀어 놓은/ 밤꽃냄새/ 퍽징하네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은/ 다 저렇게 남의 코를 찌르는가 보네/ 인간도/ 가장 오래 헤맨 자의 발바닥이/ 가장 독한 냄새를 풍기는 법
안도현 – 이 세상 소풍와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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