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다
별들의이주 2025/12/3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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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잠에서 깨다
- 정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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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긴 잠에서 깨다』가 출간되었다. 조세이 탄광에서 이어진 강제노동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는데 앞장선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고 정병호 교수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다. 부제는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으로 ‘공공인류학’은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공공 영역에서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그 해결을 위해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던 정병호 교수는 일본 어린이집들을 비교하는 현장 조사 연구를 위해 홋카이도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골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도노히라 스님을 만나 슈마리나이 우류댐 공사 현장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노히라 스님은 10년째 유골들을 수습해 불교식으로 화장해왔고 역사 현장의 훼손을 우려한 정병호 교수는 여러 전문가와 학생들을 꾸려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1997년 여름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고된 발굴 작업을 함께 하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서로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감정이 상한 적도 있지만 개개인의 인식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또 한편으로 언어와 지역, 성별, 그리고 마음의 벽을 넘어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며 연대하는 과정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이런 시민 사회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나 외교의 영역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관심, 지역 주민들의 공감에 힘입어 좋은 분위기에서 유골 발굴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2006년 아사지노 유골 발굴 당시 우익의 방해와 정치적 논란에 흔들리는 아픔도 있었다. 슈마리나이 유골 발굴이 언론에 보도되고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문제가 이슈가 되자 삿포로별원에서 조선인 유골 101구를 합골 처리해버린 일도 있었다. 한국의 여러 정부 기관이나 단체의 형식적이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경험하기도 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의 기조가 달라져 유골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했다.
p.137
기억과 애도를 정치적 도구로 삼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희생자를 외면하고 정치화하게 된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유골 발굴이 단지 과거의 흔적을 파내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기억 투쟁이 돼야 한다”(p.175)는 생각을 바탕으로 강제노동 희생자들이 끌려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유골 봉환을 하는 과정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학계는 물론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에서 마음을 모았다. 유골 안치에 난항을 겪던 중 고 박원순 시장 덕분에 ‘70년만의 귀향 묘역’을 만든 에피소드도 있었다. 박근혜와 아베에 이어 윤석열과 기시다 정권이 드러낸 ‘식민주의적 힘(p.213)’과 권력의 담합을 우려하기도 했다.
정병호 교수와 여러 사람들의 활동은 1997년 슈마리나이 유골 발굴에서 그치지 않았다. 홋카이도에 머무는 동안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에 대한 가슴 아픈 역사를 알게 되었고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틈새’에서 차별 받으면서 살아온 자이니치의 현실을 목도한 뒤 한일 양국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힌 ‘동아시아 공동 워크샵’을 출범시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를 바로 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현재는 물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며 이해관계를 넘어 연대를 실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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