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을 건너 다시 손에 쥐어진 귤
별들의이주 2023/10/2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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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 이희영
- 11,700원 (10%↓650)
- 2023-09-22
- : 12,376
p.188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형의 세상을 엿보았고 결국 알게 되었다. 그곳에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터치 한 번이면 사라질 가상 세계.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누군가의 진심이 있다면 그곳은 현실보다 더 소중한 공간이 될지 모른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형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선우혁이 메타버스 ‘가우디’를 통해 12년 전 죽은 형 선우진의 흔적을 발견하며 아무도 몰랐던 진실을 찾는 이야기다. 메타버스가 상용화되어 각자의 아바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대화하고 싶은 인물의 음성 파일과 메시지를 입력해 가상 음성 친구를 만드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과학이 발전한 미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선우혁은 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다섯 살 때 형이 죽었기 때문이다. 형의 학교생활은 어땠을지 궁금해 하며 ‘프프’라는 가상 음성 친구 앱을 통해 형의 음성을 복원해 대화를 나누고 형의 아이디로 메타버스에 들어가 ‘가우디’에 접속한다. 가우디는 오래 전 유행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는 집짓기 게임이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형이 만든 정원과 2층짜리 하얀 벽돌집이 남아 있었고 12년 동안 그곳을 가꿔온 ‘곰솔’이라는 아바타가 나타나 형의 아바타인 ‘JIN’을 반겨 주었다. 곰솔은 과연 누구일까?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열 개의 편지, 10년 동안 학교를 다닌 학생이 있다는 괴담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열세 살 차이지만 형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선우혁을 보며 부모님과 교감 선생님, 형 친구인 정수민은 고등학교 때 세상을 떠난 선우진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형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선우혁은 누구도 형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우디에 만든 공간과 공유친구 곰솔이 형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추리해간다. 열쇠는 선우혁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열 개의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이 바로 ‘곰솔’이며 선우진과 같은 반 여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편지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온점’을 건드리고 미술 견학 수행평가를 함께하면서 풋풋한 감정을 나누었던 모든 순간들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귤 때문에 겨울이 즐거웠던 곰솔이 두 번 다시 귤을 먹지 못하게 된 이유가 마음 아팠다. 자신 앞에 죽은 선우진과 똑같은 얼굴로 나타난 선우혁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비밀을 품고 가상 세계 속에 머물렀던 곰솔의 감정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마지막 문단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긴 시간을 건너 손에 쥐어진 귤이 무척이나 달고 새콤할 것이기에. 그 귤을 건넨 사람은 슬픔에 매몰되지 말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 삶을 살아가라는 선우진의 메시지일 것이므로. 이 책을 읽고 제주에서 귤 한 상자를 구입했다. 앞으로 귤을 볼 때마다 JIN과 곰솔이 지나온 계절을 오래도록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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