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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 9,000원 (10%500)
  • 2013-07-24
  • : 32,085

김영하 - 살인자의 기억법.



* 결말이며 이런저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0.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짖궂은 농담이다."

제일 좋았던 문장이다.


1.

글이 깔끔하고 정확하다. 말하고자 하는 것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는다.


2.

이 소설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결말로 힘차게 수렴하는 것 같다가도 대뜸 이상한 부분에서 곁가지가 뻗는다. 두부백반 하는 법이며 오르는 난방비에 대한 언급, 좀비에 대한 믿음 등이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차게 뻗는 줄거리가 거목처럼 우뚝 서 있고, 그 거목에 이런 저런 잔가지가 어우러져서 전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런 디테일이 결말에 힘을 보탠다. 이런 잔가지의 선택이며 전체적인 풍경의 조화로움이 결국 글을 잘 쓰는 작가와 못 쓰는 작가를 구별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김영하는 잘 쓰는 쪽이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은 담담한 서술체와 유머가 좋다. 주인공 김병수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호들갑을 떠는 일 없이 담담하고 차분하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이 든 남성의 느낌이 나서 좋았다. 유머 역시 내가 참 좋아하는 방식인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유머 포인트는 사용하기도 어렵지만 설명하긴 더 어렵구나.


이후 스포일러 ▼

 


3.


독자로서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는 소름끼친다.

주인공 김병수의 인생은 철저히 자기 자신 안에서 생겨나 그 안에서 종결되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뒤로, 그의 인생 대부분은 아무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대숲 아래에 파묻힌 시체들의 존재며 그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은 김병수 본인만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연쇄살인은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츠하이머로 인해 이 기억은 소멸의 위기에 처한다. 김병수가 자신을 연쇄살인범으로 인지하고 있는 이상, 알츠하이머는 자아 소멸의 위기이기도 하다.

김병수는 자기 자신 속에 감춰둔 지난 살인의 기억을 시로 쓴다. 시는 단단히 감춰둔 그의 인생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매개이다. 돈을 주고 시집을 내기도 하고 비슷한 사람들과 교류도 한다. 하지만 뻔뻔스레 알맹이를 까보인 그의 시를 날것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 결국 인생의 한 단락을 차지한 살인의 기억은 김병수 자신에게만 머무른 채 종말의 위기를 맞는다.

읽는 이는 치매 때문에 김병수의 기억에 구멍이 뻥뻥 뚫리거나 왜곡되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중후반부를 지나면서 그의 기억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서운 점은 김병수의 기억이 언제부터 왜곡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은희의 중학생 시절 기억은 김병수가 요양보호사를 만나고 난 뒤에 만들어낸 기억인가, 아니면 어린 은희를 살해한 뒤로 계속 길러온 망상의 한 파편인가? 그리고, 알츠하이머 이후로 기억의 왜곡이 생긴 것인가, 아니면 알츠하이머는 원래 존재하던 기억 왜곡을 가속시킨 것 뿐인가? 이 부분이 확실치 않아서 더 무섭다.

분명한 것은 김병수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이 대부분 망상에 기초해있다는 점이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귀기울이지 않는 망상. 이는 김병수가 스스로의 내부 세계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 안에서 도돌이표를 찍을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그가 실제로 요양 보호사를 죽였건 아니건, 그는 알 길이 없다. 그와 그의 인생은 다른 모든 사람을 포함한 실제 세계와 판이하게 동떨어져 있다.


"나는 거대한 우주의 한 점에 고립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책 145쪽)


결국 자신만이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세계-스스로의 내부에 갇힌 채 김병수의 자아는 종결을 맞는다.




4.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사족.


+ 반야심경 나와서 살짝 짜증날 뻔했다. 동양 철학은 마음에 와닿긴 하지만 너무 어렵다... 그래도 책 내용이랑 이렇게 연결되는 게 인상깊다. 나도 집에 있는 도덕경부터 도전해볼까?

+ 원래 이 책을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될 때에 읽게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서울에 갔다가 문학동네에서 하는 카페에서 음료 교환권과 함께 싸게 구매했다. 프로모션 열심히 하더라. 책 많이 팔리겠다... 

+ 어머니께서 이런 소재의 책을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이 책은 참 잘 읽으셨다. 빛의 제국도 읽어보라고 하셨다. 읽겠습니다 어머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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