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찬송님의 서재
  • 목회자의 소명
  • 유진 피터슨
  • 11,700원 (10%650)
  • 2012-09-13
  • : 650

 

도서관 서가를 돌다가 눈이 마주친 책. 샛노란 색의 책표지라 눈에 띄었다. 우연히 발견한 책을 망설이지 않고 책들 사이에서 빼냈다. 한동안 신앙도서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자각과 반성과 함께. ‘한 걸음씩 부르심을 따라가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진 피터슨의 <목회자의 소명>(유진 피터슨/양혜원 옮김/포이에마)은 목회자의 소명과 목회자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성경 ‘요나서’에서 그 해답을 찾아간다. 저자의 깊은 영성과 통찰력을 만나볼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은 목사라는 ‘직업’과 ‘소명’은 별개라고 전제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소명’은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기술로 대체되었다고, 성공주의, 소비주의에 물든 목회현장에서 진리보다 종교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목양의 자리가 기업경영처럼 되어가고 프로그램 관리 등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소진하고 화석화되어가는 현대의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면 ‘영성의 자리’, 곧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그리고 영적 지도의 자리에 설 것인지 길을 찾아 모색한다. 그 역시 같은 고민으로 방황했던 적이 있었고 그 갈등을 해소하였었기에 같은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동역자들에게 소명을 찾아가는 길을 그의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요나의 모습을 통해 제시한다.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내가 하려는 일은 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바로 잡고, 그 일에 적합한 영성을 계발하는 것이다. 교회의 임무를 내게 맡긴 사람들이라며 내게 전해준 것은 적절하지가 않다. 제도 안에서 경력이나 쌓아가려는 쭈그러들고 진이 다 빠진 영성도 적절하지 않다. 겉치장에 불과한 카리스마 영성도 적절하지 않다. 나는 성경적으로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 창조와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잘 계발된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 여유롭고 성령 안에 푹 잠긴 영성이 필요하다.”(p18~19)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더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이고 자기를 드러내기에 그럴 듯 해 보이는 곳인 다시스를 가다가 풍랑을 만난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풍랑이란 것을 알게 된 그는 ‘나를 바다에 던지라’하고, 고래 뱃속에서 3일간 아스케시스를 경험한다. 그리고 순종의 자리 니느웨로 간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는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의 길이라 말한다. 다시스는 곧 ‘하나님을 파는 장사꾼’의 길이다. 니느웨는 ‘소명의 거룩한 길’이다. 다시스 종교를 거부하고 복음소명을 회복하고 니느웨로 가란다. 그는 또한 목회자가 빠질 수 있는 영적 교만과 위험성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것은 목회자 자신이 속기 쉽고 남을 속이기 더 쉬운 영혼의 범죄라는 것이다.

 

다시스와 니느웨.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들이 되었다. 순전한 복음, 순전한 그리스도인, 순전한 소명과 사역자로 나아가리라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편리를 따라 이익을 따라 움직이며 다시스와 니느웨, 직업과 소명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유진 피터슨 역시 심각하게 이 두 사이에서 고민하며 관통해 왔기에 더욱 설득력 있게 와 닿는다.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빌자면 다시스는 우선 니느웨보다 훨씬 재미있다. 니느웨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겹겹이 쌓인 지역이며,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은 이력이 좋은 히브리 선지자가 탐낼 만한 임무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스는 달랐다. 다시스는 이국적이고 모험이다. 다시스에는 환상 속의 온갖 장식들로 꾸며진 미지의 세계가 주는 매력이 있다. 문헌에 따르면 다시스는 “멀리 떨어져 있고 때로는 이상화된 항구”였다. (열왕기상12:22)에 보면 솔로몬의 다시스 선단이 금, 음, 상아, 원숭이, 공작을 실어왔다고 한다. 셈족의 언어와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자 고든(C.H.Gordon)에 의하면 다시스는 대중이 상상하는 “머나먼 낙원”이었다.

 

멋진 다시스로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난 요나. 멋진 종교 경력을 쌓으려 하던 그는 폭풍 한가운데서 자기 때문에 일어난 폭풍임을 알고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3일 동안 고래 뱃속에 있게 된 요나. 다시스 여행은 망쳤지만, 그의 소명은 구원 받았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보내면서 그의 소명은 구원았다. 사흘간의 기도...그것은 ‘아스케시스’의 시간이었다. 요나의 ‘아스케시스’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스케시스는 갇힌 장소, 피할 수 없는 극심한 한계점, 한계의 장소이다. 강제된 것이었지만 이러한 아스케시스의 시간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필요로 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깊어지게 하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또 한 가지 비자발적 아스케시스는 투옥이다. 신약 성경의 최고 본문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과 밧모 섬에 갇힌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 톨레토 감옥에 갇혔던 십자가의 요한, 버밍햄 감옥에 갇혔던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갇혔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은 감옥에 갇혔을 때 나오는 영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대면한다. 목사들이 일하면서 마주치는 다른 비자발적 아스케시스에는 실업, 이혼, 사별, 그리고 유배 가듯 새로운 곳으로 가는 이사 등이 있다.”(p139~)

 

요나는 종교경력(다시스)을 버리고 진정한 목사가 되기로 결심. ‘아스케시스’를 받아들이고 또한 기도의 삶으로 니느웨로 간다. 그가 니느웨로 간 것은 기꺼운 마음이 아닌 그저 순종하는 마음이다. 니느웨는 화려하지도 않고 별로 기대할 것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곳이다.

 

유진 피터슨은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후에 목회의 위기를 만났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으나 그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요나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 당시를 미국 종교의 배에 자신이 승선해 있었고 프로그램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갈등 중에 있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그는 그 바다 폭풍 한 가운데서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정의했다. “나는 사람들을 그냥 살리기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열정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p78)

 

유진 피터슨은 언제나 있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목회자들의 위기를 그 역시 경험했기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위기와 시험, 문제를 넘어서는 방법을 성경 요나서와 함께 풀었다. 다시스로 갈 것인가, 니느웨로 갈 것인가. 다시스의 삶을 계속 그대로 갈 것인가.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결단하고 아스케시스를 지나 니느웨로, 소명의 자리로 갈 것인가, 결단할 것을 요구한다.

 

옥스퍼드대학의 현대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목회의 삶은 기도의 삶이다. “영적 지도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람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다.”(p265) "지도는 길을 제시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함의가 분명한 단어이다. 그러나 영적 지도는 그러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단정적이지 않고 말이 없다. 영적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길을 비켜주는 것’, 상대에게 중요하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목표는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거기에 있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지도는 예배 행위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다.”(p282) 라는 저자의 말이 깊이 와 닿는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생활을 사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야말로 다시스의 목회와 다시스의 성도들이 있는 자리, 그 현실의 삶 속에서 깨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바로잡고 영성을 계발하라는 유진 피터슨의 요청. 니느웨의 소명을 어떻게 오롯이 감당하며 살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직업’과 ‘소명’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하는 당신에게 일독을 권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도서관 서가를 돌다가 눈이 마주친 책. 샛노란 색의 책표지라 눈에 띄었다. 우연히 발견한 책을 망설이지 않고 책들 사이에서 빼냈다. 한동안 신앙도서에서 좀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자각과 반성과 함께. ‘한 걸음씩 부르심을 따라가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진 피터슨의 <목회자의 소명>(유진 피터슨/양혜원 옮김/포이에마)은 목회자의 소명과 목회자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성경 ‘요나서’에서 그 해답을 찾아간다. 저자의 깊은 영성과 통찰력을 만나볼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은 목사라는 ‘직업’과 ‘소명’은 별개라고 전제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소명’은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기술로 대체되었다고, 성공주의, 소비주의에 물든 목회현장에서 진리보다 종교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목양의 자리가 기업경영처럼 되어가고 프로그램 관리 등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소진하고 화석화되어가는 현대의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면 ‘영성의 자리’, 곧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그리고 영적 지도의 자리에 설 것인지 길을 찾아 모색한다. 그 역시 같은 고민으로 방황했던 적이 있었고 그 갈등을 해소하였었기에 같은 고민으로 힘겨워하는 동역자들에게 소명을 찾아가는 길을 그의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요나의 모습을 통해 제시한다.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내가 하려는 일은 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바로 잡고, 그 일에 적합한 영성을 계발하는 것이다. 교회의 임무를 내게 맡긴 사람들이라며 내게 전해준 것은 적절하지가 않다. 제도 안에서 경력이나 쌓아가려는 쭈그러들고 진이 다 빠진 영성도 적절하지 않다. 겉치장에 불과한 카리스마 영성도 적절하지 않다. 나는 성경적으로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 창조와 언약에 뿌리를 두고 잘 계발된 영성, 그리스도 안에서 여유롭고 성령 안에 푹 잠긴 영성이 필요하다.”(p18~19)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더 좋아 보이고 편해 보이고 자기를 드러내기에 그럴 듯 해 보이는 곳인 다시스를 가다가 풍랑을 만난다. 자기 때문에 일어난 풍랑이란 것을 알게 된 그는 ‘나를 바다에 던지라’하고, 고래 뱃속에서 3일간 아스케시스를 경험한다. 그리고 순종의 자리 니느웨로 간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는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의 길이라 말한다. 다시스는 곧 ‘하나님을 파는 장사꾼’의 길이다. 니느웨는 ‘소명의 거룩한 길’이다. 다시스 종교를 거부하고 복음소명을 회복하고 니느웨로 가란다. 그는 또한 목회자가 빠질 수 있는 영적 교만과 위험성을 조심하라고 한다. 그것은 목회자 자신이 속기 쉽고 남을 속이기 더 쉬운 영혼의 범죄라는 것이다.   다시스와 니느웨.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들이 되었다. 순전한 복음, 순전한 그리스도인, 순전한 소명과 사역자로 나아가리라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편리를 따라 이익을 따라 움직이며 다시스와 니느웨, 직업과 소명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유진 피터슨 역시 심각하게 이 두 사이에서 고민하며 관통해 왔기에 더욱 설득력 있게 와 닿는다.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빌자면 다시스는 우선 니느웨보다 훨씬 재미있다. 니느웨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겹겹이 쌓인 지역이며,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은 이력이 좋은 히브리 선지자가 탐낼 만한 임무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스는 달랐다. 다시스는 이국적이고 모험이다. 다시스에는 환상 속의 온갖 장식들로 꾸며진 미지의 세계가 주는 매력이 있다. 문헌에 따르면 다시스는 “멀리 떨어져 있고 때로는 이상화된 항구”였다. (열왕기상12:22)에 보면 솔로몬의 다시스 선단이 금, 음, 상아, 원숭이, 공작을 실어왔다고 한다. 셈족의 언어와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자 고든(C.H.Gordon)에 의하면 다시스는 대중이 상상하는 “머나먼 낙원”이었다.   멋진 다시스로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난 요나. 멋진 종교 경력을 쌓으려 하던 그는 폭풍 한가운데서 자기 때문에 일어난 폭풍임을 알고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3일 동안 고래 뱃속에 있게 된 요나. 다시스 여행은 망쳤지만, 그의 소명은 구원 받았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보내면서 그의 소명은 구원았다. 사흘간의 기도...그것은 ‘아스케시스’의 시간이었다. 요나의 ‘아스케시스’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스케시스는 갇힌 장소, 피할 수 없는 극심한 한계점, 한계의 장소이다. 강제된 것이었지만 이러한 아스케시스의 시간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필요로 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깊어지게 하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또 한 가지 비자발적 아스케시스는 투옥이다. 신약 성경의 최고 본문들이 감옥에 갇힌 바울과 밧모 섬에 갇힌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 톨레토 감옥에 갇혔던 십자가의 요한, 버밍햄 감옥에 갇혔던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갇혔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은 감옥에 갇혔을 때 나오는 영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대면한다. 목사들이 일하면서 마주치는 다른 비자발적 아스케시스에는 실업, 이혼, 사별, 그리고 유배 가듯 새로운 곳으로 가는 이사 등이 있다.”(p139~)   요나는 종교경력(다시스)을 버리고 진정한 목사가 되기로 결심. ‘아스케시스’를 받아들이고 또한 기도의 삶으로 니느웨로 간다. 그가 니느웨로 간 것은 기꺼운 마음이 아닌 그저 순종하는 마음이다. 니느웨는 화려하지도 않고 별로 기대할 것도 없는 곳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곳이다.   유진 피터슨은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후에 목회의 위기를 만났다고 고백한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으나 그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요나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누워 있었다. 그는 그 당시를 미국 종교의 배에 자신이 승선해 있었고 프로그램을 따라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갈등 중에 있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그는 그 바다 폭풍 한 가운데서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정의했다. “나는 사람들을 그냥 살리기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열정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p78)   유진 피터슨은 언제나 있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목회자들의 위기를 그 역시 경험했기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위기와 시험, 문제를 넘어서는 방법을 성경 요나서와 함께 풀었다. 다시스로 갈 것인가, 니느웨로 갈 것인가. 다시스의 삶을 계속 그대로 갈 것인가.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 결단하고 아스케시스를 지나 니느웨로, 소명의 자리로 갈 것인가, 결단할 것을 요구한다.   옥스퍼드대학의 현대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목회의 삶은 기도의 삶이다. “영적 지도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사람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다.”(p265) "지도는 길을 제시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함의가 분명한 단어이다. 그러나 영적 지도는 그러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단정적이지 않고 말이 없다. 영적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길을 비켜주는 것’, 상대에게 중요하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목표는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거기에 있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지도는 예배 행위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가 상관해야 하는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다.”(p282) 라는 저자의 말이 깊이 와 닿는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인 생활을 사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야말로 다시스의 목회와 다시스의 성도들이 있는 자리, 그 현실의 삶 속에서 깨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바로잡고 영성을 계발하라는 유진 피터슨의 요청. 니느웨의 소명을 어떻게 오롯이 감당하며 살 것인지 고민하게 한다. ‘직업’과 ‘소명’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하는 당신에게 일독을 권한다." />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