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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噺各哂(옥신각신)

 제주에서의 둘째 날, 늦은 점심을 먹고 - 혼자 지내는 4박 5일 동안 주인집 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호강을 누렸다 - 민박집 골목을 나섰다. 최근에 명소가 된 집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새마을 운동 때 지은 집들처럼 빨강 파랑 지붕의 단층집들 사이사이에 다소 엉뚱하게 자리 잡은 도예품 가게, 카페, 게스트하우스, 술집, 서점...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먼저 도예품 가게에 들러 여행기간 동안 쓸 커피 잔과 소주잔을 눈으로 점찍어 놓고 가게를 나섰다.

 아직 영업전인 술집은 전날 밤 창 너머로 봤기에 사진으로 담았다. 발걸음을 옮겨 카페로 갔다. 밖에 세워진 메뉴판을 읽어보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있는 특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動詞)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있다."

 

 김화영은 알고 있었던 그 동사의 의미, 쉰 넷의 나 역시 청춘인걸까. 위의 동사들을 눈으로 읽는 순간 목구명이 꽉 막혔다. 비행기가 공중을 사광斜光처럼 날아오를 때, 내 눈시울이 뜨거웠던 것도 그래서였구나하고 깨닫는다.

 

민박집 1월 풍경

 

 "우리들이 참으로 '떠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미지(未知)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윰'은 참으로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無用)하게 하는데 그것의 힘이 있다. 행복을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낙원을 향하여 떠나는 자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지불하는 순간에 진동시키는 놀라움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구불구불한 제주 특유의 구멍 숭숭 돌담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올라섰다. 지붕 선을 따라 눈길이 죽 가다가 멈춘 곳은 한라산이다. 십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 어디에서라고 제주 한가운데로 눈을 들면 정수리에 흰 눈을 쓴 한라산이 인심 좋은 할아버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곳 종달리에서는 흐릿하게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덕을 내려와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골목길에서 양팔을 벌렸다. 소리치며 달리고 싶었지만 우적우적 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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