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특급
유지선 2022/10/2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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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타인들
- 유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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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2022-10-17
: 380
국딩 시절, [환상특급]이라는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SF와 판타지, 스릴러의 특성을 혼합한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시리즈였다. 나는 딱히 위의 세 가지 장르에 취미가 없음에도 환상특급은 무척 좋아했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건대, 단편 특유의 반전과 시리즈 중심을 관통하는 아이러니, 허무주의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공상과학이나 판타지라는 외피를 입었으나 상상력의 큰 부분은 인생에 던져지는 극단적인 선택지와 일반적이지 않은 해결(대부분 파국)에 할애되었다. 기가 막힌 상황 속에 이입된 채 시청자는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산다는 건 어떤 걸까에 대해 짧게나마 고민하게 되곤 했다.
대개의 에피소드는 아련하게 슬펐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초자연적인 사건들만큼이나 예측 불가능한 운명에 대한 체념 어린 결말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나는 그 슬픔에 잠식될 뻔 하다가 저녁 밥상과 함께 안온한 일상으로 빠져나오곤 했다. (KBS 2에서 초저녁 시간에 방송했다)
유이월 작가의 [찬란한 타인들]을 읽으면서 나는 자꾸만 [환상특급]을 떠올렸다. 어떤 이야기들이 피어나듯 ‘환상적인’ 전개를 보여주기도 했고, 대부분의 작품에 심긴 기가 막힌 반전과 기저에 깔린 쓸쓸한 정서가 아무래도 닮았다…기보다는 내게 비슷한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닮았다기엔 너무 다른 두 작품이다 사실) 나는 웃고 감탄하고 깊이 슬퍼하다가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거나 책을 덮고 내 삶으로 넘어 올 수 있어 행복했다.
환상적이거나 황망하기 위해서 반드시 [환상특급]에서처럼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거나 귀신 들린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생은 원래 부조리하고 아이러닉하다. 그것을 공상과학이나 심령과학 등의 장치 없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과 소재로 풀어낸 [찬란한 타인들] 속 이야기들은 그래서 빼어나다. 몇 이야기에서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할만한 문학적 도구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이야기는 사랑이 싹 트고, 식고, 배신을 깨닫고, 스스로의 오랜 신념을 져버리는 등 우리가 늘상 겪는 감정을 면밀히 따라가며 그 안에 숨어 있는 기만과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까발린다. 그리고 그 까발리는 방식은 은근하고 따뜻하다. 수박 고르는 행위에 회의적인 합리주의자가 미신이라 믿었던 것에 굴복하는 이야기라든가 여자를 무서워하는 쿨병 소년이 고백 받고 흔들리는 이야기에 조롱의 흔적은 없다.
나는 어떠한 책이든 글 솜씨 이전에 작가의 개성이 결국 작품을 결정 짓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작가는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 그 안에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독자의 가슴에 아주 작은 돌을 던져 얼마만한 파문이 생기는 지 관찰하고는 됐어, 잊어버려 하고 장난스럽게 웃는 사람같다. 그의 아이러니는 폭로가 아니라 발견이고 인정이자 응시이다. 삶 속의 부조리와 싸워 무엇하겠나. 내게 일어나는 일도, 심지어 내 마음의 변화조차,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오만일 수 있다. 판단을 보류하고 웃는 얼굴로 봐주자고. 그러한 면에서 [찬란한 타인들] 속 공간은 내게, 해와 달이 공존하고 타인에 대한 단죄를 거부하는 아름다운 중간지대, twilight zone(환상특급의 원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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