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특이 하다. <용서라는
고통> 이라니. 용서는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 않나? 특히 기독교에서는 신적 용서가 우리에게 먼저 주어졌기에, 그에 대한
반응적인 의무로서 내게 가해진 잘못 역시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의 특권이며, 성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고통이라니. 물론 이해할 만하다. 가해자는 뉘우치지 않는데 용서하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설령 뉘우친다고 해도, 피해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상실에 대한 슬픔과, 가해자에 대한 증오라는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 한다. 고통이 맞다. 그럼 고통이기에 용서를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다만, 손쉽게 의무처럼, 기계적으로
용서를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엄청난 고통이기에, 누구나
마땅히 해야하는 것처럼 피해자에게 요구할 수 없다. 장별로 요약을 하면서, 용서가 얼마나 고통인지를 함께 살펴보자.
1장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긴 시간의
투쟁과 싸움을 통해서 겨우, 그때에도 완전한 보장은 할 수 없는,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용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나서 저자는 용서의 여러 차원들을 구분한다. 신적 용서, 인간의 용서, 자기
용서, 그리고 용서와 사면의 구분. 다음으로 저자는 자신이
용서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사례연구가 아니라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용서라는
것 자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의 형태를 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야기가 그러하듯 용서는 불가사의하며,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고 예측불가하기 때문이다. 용서 과정은 기계적인 공식이 아니다.
2장 “상처의
황무지.” 사람 사이의 신뢰를 파괴하는 상처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에서부터 한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파괴적인 상처까지. 저자는 이것을 4가지로 구분한다: 사소한 상처, 실제적
상처, 심각한 상처, 그리고 파괴적 상처. 저자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상처에 대해서는 이렇게 다양한 묘사를
하면서 용서는 단 하나의 단어로만 표현한다. 따라서 용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에 따라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번째 단계의 상처 같은 경우에는 용서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하지만, 파괴적인 극심한 상처의 경우에는 용서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분량에 있어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저자는 이 장에서 용서와 의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3장 "고문
그후" 에서 저자는 두가지 글 - "철도원이야기" 와 "해바라기"를
통해서 고문과 억압당한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다룬다. 간략히 말하면 "철도원이야기"는 제2차 대전 중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철길노동자로 일하며 고문을 당했던 미국인의 이야기이다. 그가 얼마나 긴 시간과 또 수많은 우연한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용서의 길로 결국에 가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해바라기"는 나치포로수용서에서 잡혀 있던 한
유태인이 죽어가던 독일군 장교의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요청에
침묵으로 거절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 침묵이 그 유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존하는, 또 정당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장에서 저자의 주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문장이다: "중요한 것은 용서가 무턱대고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특히 신앙인들에게 용서는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시간적인, 감정적인 고려 없이 무조건 해야 하는 차가운 객관적인
명령으로 다가온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전도연 분)이 신앙의 힘으로 자식을 잃은 아픔을 극복하며
내린 큰 결단이 바로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종교적 신앙 체계안에서 명령처럼
다가오는지 볼 수 있다.
이런 의무로서의 용서라는 부담 외에도, 피해자는 한가지 짐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용서가 개인적인 덕목도 아니며,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저자가 "철도원이야기"를 분석하며 보여주듯이 용서에는 수많은 외부적 요인들이 작동한다. 작동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 덕목보다도 훨씬 더 결정적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다시 인용하지만, "용서가 무턱대고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해지는 것이다.
4장 "용서할
의무?"는 성경이 용서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지 검토한다. 성경의 많은 절들이 마치
우리가 신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당위나 시험처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지 못하는 처벌을 받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의 견해를 빌어서 저자는 우리의 사고가 용서의 “윤리”에서 용서의 “정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에베소 4:33)은 그의 용서를 받기 위해 (의무) 가 아니라 그가 용서하셨기에 (정신), 용서해야 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용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용서할 수 없을
때에도 무조건 용서하라’가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사랑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저자는 용서의 의무에서
용서의 정신, 성향, 마음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5장 “분노, 분개, 원한”에서는 이 각각의 감정들에 대한 양면적인 –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 평가를 내린다. 우선 분노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노는 동시에 위험한 감정일 수도 있기에 용기를
가지고 이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분노가 끓어오르는 일상적인 화라면,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지는 감정이라면, 분개는 그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잡은 감정이다. 이 감정 역시, 정의라는 기준에 대한
올바른 감각을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결국에는 분개의 주체와 그 주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분개가 더 정착되고 사람 안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것을 원한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한 사람의 생존기제로 작동한다는 면에서
어쩔 수 없는 기능을 하지만, 결국에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면에서 그 작용이 이중적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이 세가지 긍정적이며 또 부정적인 감정들이
용서라는 것과 궁극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원한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원한이 제 할 일을 다하고 나면 가만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6장 “살인 그
후”에서는 살인을 경험한 두가지 다른 이야기를 다룬다. 하나는 북아일랜드에서 있었던
한 폭파사건의 생존자의 말과 그로 인해 촉발된 논쟁이다. 윌슨이라는 이름의 생존자는 폭발로 자신의 딸을
잃고 그 자신도 테러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건 직후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들에 대한 어떠한
원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함으로서 성급한 용서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당시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들에게
일반적인 개념은, 뉘우침이 있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윌슨의 말은, 가해자의 뉘우침도 없는 맥락에서, 성급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용서라는
것이 뉘우침에 대한 반응 이라고만, 즉 무언가 선행되어야만 진행되는 거래로서 본다면, 피해자들에게서 선택권/자율성이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윌슨의 말 중에서 그가 “용서”가 아니라 “원한이 없다” “분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윌슨은 적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에 아파한 것을 우선시 했으며, 성급히 최종적인 용서를 선포하는 대신에 신중한 방식으로 용서의 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또한 여동생을 연쇄살인범에게 잃고서 용서 해야겠다는 초기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살의적 분노를 경험했던, 그러나
긴 여정의 결국에는 그 슬픔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가해자의 마음에 공감하게 되는 메리언이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이야기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데서 드러난 시적poetic 특성 때문이다. 시에 드러나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우리가
규범과 규칙으로 제한시킬 수 없다. 이는 앞장들에서부터 계속반복되는 저자의 강조와 맥을 같이 한다. 용서라는 것은 수많은 우연적이며 외부적인 요인들과, 개인의 성격
등 여러 요인들의 합동 작용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궤도를 따르는 과정 같은 것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다른 말로 “신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한 사람의 영웅적인 용서 행위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의무나 규범, 도덕적 모델이 될 수가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7장 “영성으로서의
용서.” 이 장에서 저자는 용서라는 관점에서 예수사역의 클라이막스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십자가 죽음, 부활, 최후의
만찬을 살펴본다. 특히 저자는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끝없는 뉘우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인간적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간의 갈등과 그에 대한 끝없는 뉘우침으로 말이다. 용서의 정신은 자신을 포기하고 남을 향하는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그에 이르는 길은 예수가 경험했듯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용서라는 것이 절대로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이며, 반복해서
그것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인지를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지향성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8장 “용서자
신드롬”에서는 용서를 대하는 사람들의 두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반응을 살펴본다. 첫째는 “용서 부추기기”이다. 예를 들자면, 피해자들이 심리적으로 피해사건을 극복하려면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됨으로써, 마치
신처럼 용서를 베풂으로서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고 말이다. 용서부추기기가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가해행위가 현재 진행형인” 경우이다. 그럴 때 용서는 미덕도 아니며, 피해자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 둘째 반응은 “용서자 신드롬”이다. 첫째
반응이 피해자 주변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면, 둘째 반응은 피해자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에게, 때로는 타인들에게 훌륭한 용서자로 비취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우리가 용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두 극단적인 반응과는 구분되어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복되어서 나타나지만, 용서는 “느리고 깊고 예측불가하며 수수께끼와도 같은 예민한 것이다.”
9장 “악마와의
대면”에서는 남아공 진실화해 추진과정을 기록한 책인 <그날
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를 통해서 가해자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부담스러운 정서적
상태를 고찰해본다. 이 책의 저자인 품라 고보도-마디키젤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악행의 총책임자격인 유진 드 콕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다. 문제는 대화가 진행되면서
저자가 드콕에 대해서 공감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되면서 발생한다. 뉘우친 사람이라지만, 어떻게 악마와 공감할 수 있는가? 나도 잔악한 가해자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가? 이것을 그녀는 “달갑지 않은 공감”이라고 말한다. 용서과정에서 필수적일 가해자와의 공감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시간을 들여 묘사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공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선물로서
건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하지만 “치유로 가기까지의
여정은 고통이다.”
10장 “다시 상상하는
용서.” 8장에서 그가 용서를 예측불가한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정형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장에서는 질 스코트를 인용해서 “시”라고 말했고, 자크 데리다를 인용해 “미친짓”이라고 말한다. 용서가
시적이며 심지어 미친 행동과도 같다면, 그것은 창조성을 지닌 개인이 할 수 있는 “관대한 신뢰의 모험”이지, 모두에게
짜 맞춘듯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용서가 “과정”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통제가 가능하며, 끝이 명확하게 상정되는 “과정”일수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용서의 메타포는 “전형이 아닌 지도”이다. 과정이나 모델처럼 정형화된 것이 아닌, 어렴풋한 틀로서 지도로, 그리고 그 위에서 용서라는 공감의 강을 건너는 모험으로 말이다.
11장 “용서하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저자가 계속해서 용서 그 자체와 구분하는 단어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용서는 너무 빠르며, 힘들다. 그래서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마음을 위해서는 네가지
자질이 있어야 한다: 공감, 미래 지향성, 믿음, 정의감이다. 정의감이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과연 용서할만한 부당한 일인가 하는 기본적인 판단을 한다. 또한 용서자는 선은
악보다 강하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저자는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서 공감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가해자의 뉘우침보다 우선된다고 본다. 공감을 통해서만 가해자의
현실을 바로보고 자신의 분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장인 “현자의
선물”은 예수탄생이야기에 세가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이야기에서, 황금 몰약 유향이라는 메타포를 빌려 용서에 필요한 자질로 제시한다. 앞
장에서 제시된 네가지 자질은 피해자쪽에서의 자질이라면, 이 세가지는 피해자를 보살피고 돌보는데 필수적인
자질이다.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황금은 공감의지, 몰약은 고통을 다스리는 연고, 유향은 기도이다.
우리주변에서는 끊이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미디어나 주변인들은 그럴 때마다 용서 하는 피해자들을 모델로 삼으면서,
마치 그들을 따라야할 모범으로서 삼는다. 즉각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용서라는 의무가 피해자들에게 있는양, 암묵적인
눈치를 주는 것도 미디어를 통해서 경험한다. 이 책은 이런 사고방식이 어떤 역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설명해주었다. 게다가 용서란 것을 개인의 덕성이나 품성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얼마나 피해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지우는지
지적한 점은 훌륭했다. 트라우마와 회복과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
회복과정에서 개인의 도덕적 성품보다는 개인 외적인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작동한다고 한다.
용서라는 고통이라고 한글 제목을 붙였지만 (그리고 나는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Healing
Agony이다. 직역하자면 "치유하는 고통"정도가 되려나? 용서란 것은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그 상처를 치료해나가는, 그렇기에 걸어가야 하지만, 너무나 힘든 여정이다. 이 책이 끝까지 놓치지 않고 가져가는 긴장은 용서의 고통과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너무 쉽게 당위로 기울지 않고, 동시에 포기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용서라는 여정의 신비를 잘 설명해 나간다. 종교인 뿐 아니라 누구라도,
용서라는 가치를 보존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그 고통스런 여정에 눈을 돌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