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카노 가즈아키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척 설렜다. 이게 얼마만인가? 『제노사이드』 이후 11년 만의 신간이라고 한다. 그동안의 공백이 너무 길었다. 『제노사이드』에 공력을 지나치게 쏟아부은 나머지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걸까? 무려 11년이나 걸렸지만, 다행히 작가는 신간으로 독자에게 돌아왔다. 『건널목의 유령』이란 책이다.
• ‘유령’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이 책은 유령이 나타나는 심령 현상을 다뤘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은 건널목을 찍은 사진에 나타난 유령의 정체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추리 소설이자 공포 소설이기도 하다. 공포 소설이라면 전작 『K·N의 비극』와 비슷한데, 차이점이 있다. 『K·N의 비극』은 빙의에서 비롯된 이상 반응과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건널목의 유령』은 100%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진짜 유령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서웠다. 워낙 겁쟁이라서……. 다 읽은 뒤 잠이 안 왔다. 무서워서. 결국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켠 뒤 잠들 수가 있었다. 그만큼 실감 나게 공포스러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담력이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은 마침 무더운 여름이니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선택일 듯싶다.
• 공포 소설이긴 하나 작가가 단순 재미만 추구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작가의 장기가 무엇인가. 사회파 추리 아닌가. 이 책 또한 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면서, 권력자의 치부라든가 비리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공포라는 외연의 내부를 들여다봤을 때, 은폐와 무관심이 낳은 비극적 진실의 내포가 드러난다. 심령 현상이라는 비현실적 요소에 빗대어, 작가는 사건의 평범성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어떤 죽음’은 다른 누구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단순히 방관한다면, 점차 약자의 범위는 확장되며 희생자의 수를 늘려갈 것이다. 나는 그 범주에 제외되리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 전작 『제노사이드』에서 콩고와 피그미족에 주목했던 작가는, 이번엔 소외된 자, 잊혀진 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최하계층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자국의 과오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편견과 차별 없이 한국인을 대했던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건조하고 진중한 문체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글이지만 글을 감도는 분위기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감각일까. 작가의 전작들을 두루 섭렵하는 동안, 나 또한 작가에게 친숙한 정(情)을 느끼게 된 탓일까. 정말 ‘건널목의 유령’이 존재했다면, 작가가 낸 결말에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이름 없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돌아본 작가의 소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초반부에 묘사된 기관사의 운전 장면이 굉장히 디테일하다. 초반부의 단 몇 페이지를 위해, 작가는 10여 권의 철도 서적을 읽고 전문가를 인터뷰했다고 한다. 역시 치밀한 자료 조사의 대가답다.
+ 왜 하필 1990년대가 배경인가. 90년대 과거의 일본을 보는 것은 신선했다. 작가의 말로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심령사진을 위조하는 일이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작 『K·N의 비극』에선 빙의 현상이 도시가 문명화될수록 사라져간다며 그 이유를 과학의 진보와 합리주의 사고의 대중화라고 봤었다. 이렇듯 과학의 진보는 점점 공포의 영역을 몰아내고 있다. 나중에 가면 공포가 아날로그 시대의 옛 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 한 장의 사진에서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 주인공 마쓰다. 기자가 아니라 형사를 해야 할 재목 같은데요?
+ 2023년 나오키상 후보작이었으나 아쉽게도 수상이 불발되었다. 작가님이 나오키상을 한 번 타셨으면 좋겠는데…….
+ 설마 또 후속작을 10년 넘게 걸려서 내는 건 아니겠지? 다작까진 아니어도 지나친 과작은 바라진 않는다. 작품 활동 좀 자주 해주세요……! 『제노사이드』 같은 스케일 큰 작품을 기다려봅니다.

법률을 만드는 것이 역할인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스스로를 엄벌에 처하는 법률만은 절대로 제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p28
피해자가 양갓집 영애에다가 미인이었다면 각 언론사마다 집요하게 계속 취재를 벌였으리라. p89
불우한 운명에 저항하지도 못한 채 휩쓸리는 대로 살해됐던 여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 마쓰다는 사진 속 여자에게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p224
여성 “그 아이는, 대체 무얼 위해 태어났던 거죠?” p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