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고'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게이를 마시는 것도 아닌데'
책의 소제목들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행운동은 꼭 소제목 그대로인 사람이다.
이 책의 장르 카테고리가 일단 추리,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나는 진한 느와르물이면서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흔히 느와르에 나오는 폭력은 최소화되어 있고, 다양한 인간 군상은 그야말로 휴먼 드라마이지만
이 소설은 사연이나 서사가 아니라 사람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구질구질하거나 질척하지 않고 시종일관 드라이한데 그건 오로지 주인공 행운동 덕분이다.
게이를 마시는 것도 아닌데, 딱 이거다.
술집에 술을 마시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면, 그 술집에 있는 게 게이든 헤테로든 무슨 상관이랴.
사연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작거나 크거나, 사연은 다들 있다. 그리고 사연에는 고통이 따른다. 고통은 철저히 주관적이고, 타인이 관여할 수 없다. 행운동은 철저히 그 선을 지킨다. 사연은 늘 그 따위가 된다. 그런 행운동의 시선 안에서, 오히려 사람이 명확히 보인다.
'그래서 뭐요. 내 눈에 보이는 건 당신이 단데.'
딱 이 느낌.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행운동의 담백한 냉소를 지나다 보면 거기엔 사연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 행운동이 있다.
그래서 행운동은 본인의 의도나 바람(?)과 달리 매우 재밌다.
행운동은 비겁 잔잔 소심한 주제에 (본인의 말대로) 약자는 지나치지 못하면서 알량한 무엇으로 저를 휘두르려는 자들에겐 가차없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독설을 퍼부을 때도 가만 보면 인성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건 인격이다. 사람의 격은, 성과 달리 세상을 대하는 태도니까. 그게 진심으로 통쾌하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키득키득 웃다보니 책이 끝이 났다.
이름 없이도 행운동은 행운동이다.
나는 언어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쓰는 언어가 사람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언어에 그 사람을 대표하고자 퉁치는 언어는 예외일 수 있단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이름, 정체성, 직업 같은 거.
사람은 결코 한낱 단어에 다 담기지 않는다.
뭐라고 불리든 그런 건 그 사람과 하등 상관이 없다.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 말미에 행운동이 아니라 K가 된 주인공이
다음에는 또 누굴 만나게 될 것인지 무척 궁금하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야 어디든 있는 법이고 인간은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런 인간들을 만나 호되게 당한다. 굳이 마이클이 아니더라도.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 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