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질문이 만들 정의로운 평화
두 달 전쯤 동대문구에서 36년간 무료급식 봉사를 해 온 ‘밥퍼나눔운동본부’(이하 밥퍼)가 구청으로부터 건물 철거 명령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밥퍼 시설 주위에 노숙자가 많아져 치안 문제가 우려되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과 건물 ‘불법’ 증축이 철거 명령의 근거였다. 그러나 취재에 따르면 노숙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그로 인한 범죄 위험이 증가했단 얘기도 사실이 아니었다. 현 건물이 ‘불법’이 된 것도 건물을 지을 당시 서울시와 동대문구의 손발이 맞지 않아 발생한 행정상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온전히 밥퍼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공익보다 근거 없는 소문의 편에 선 동대문구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온한 공익》을 읽으며 밥퍼가 처한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니, 동대문구가 공익을 무시했다기보다 약자의 끼니를 보장하는 밥퍼의 활동을 공익적인 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제가 보여주듯 이 책은 ‘공익’의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장애인이나 아동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쉽게 공익 활동으로 인정되며 ‘좋은 일’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반면 노동조합이 기업에 대항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일명 ‘귀족 노조’가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거니즘이나 일회용품 줄이기 등 개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환경 운동은 적극 권장되지만, 더 나아가 국가의 성장주의를 건드리는 목소리는 쉽게 무시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위 사례 중 공익으로 인정받는 것은 모두 강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어떤 약자의 사익이 공익인지 아닌지는 사회와 강자의 허용에 달렸다. 동대문구가 밥퍼의 활동과 약자의 이익을 공익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역시 밥퍼의 활동이 ‘집값’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훼손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공익의 범위를 넓히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질문한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강자에 맞선 저자와 시민들의 ‘사익’ 투쟁 사례와 변호사로서 저자가 사법 시스템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한 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된다. 공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을 억압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1장에 등장하는 공권력 남용의 사례는 국가가 공익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레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했음을 보여준다. 집회의 자유를 주장한 시위 참여자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한 경찰, 2018년 스쿨미투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한 서울시교육청, 정당한 근거 없는 행정대집행으로 용역을 동원해 노점을 강제 철거한 구청들이 그 예다. 2장에서는 기업 역시 강자로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불법 파견계약을 맺거나 위험한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등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한 사례가 제시되며 일부 사건에는 사실상 국가가 공모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2019년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삼성전자 노조 탄압에 맞서다 세상을 떠난 조합원의 유족을 만나 합의를 설득했으며 장례식장에서 노조원을 제압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2020년에야 폐기된 삼성의 무노조 정책에는 일정 부분 국가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공익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불온하다. 앞선 사례가 보여주듯 공익을 정의하는 강자의 논리에 저항할 때 비로소 공익의 범위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관행이나 판단에도 질문을 던지는 저자의 모습에서 이 책의 불온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제도나 대법원 판례의 경우 이미 권위를 지닌다고 인정받기 때문에 그 안의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 그 부조리를 인식하더라도 체념하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사안에서도 의문점을 찾고 부조리를 시정한 경우가 특히 돋보인다. 일례로 저자는 한 마리의 동물에 대해 보호자 두 명을 등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공동명의 등록이 불가한 것이 단지 시스템상 한계로 이어져 온 관행임을 확인한 후 저자는 동물 보호자의 의무와 권리 보장을 위해 그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며 행정소송으로 동물등록 시스템 개선을 이끌어낸다. 재개발 사건에서 저자는 재개발조합이 원주민에 대한 손실보상금을 공탁(법원에 돈을 맡기는 일)하면 원주민이 퇴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대법원 판례가 있는 사안의 경우 1심에서부터 어느 정도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에 판례를 반박하는 것은 상당히 불리하다. 그럼에도 그는 재개발조합이 철거민에게 주거 이전비, 이주 정착금, 이사비를 미지급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상고심에서 승소라는 결과를 얻어낸다.
저자는 우리가 결국 목표로 해야 하는 바는 갈등을 넘어 사회의 정의를 전반적으로 향상하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개별 사건의 승소가 곧장 사회 정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약자가 재판에서 이겨도 그가 돌아가야 할 사회에는 여전히 강자의 논리가 지배적이고 차별이 만연한 탓이다. 또한 여기서 ‘평화’는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저자는 정의를 위해 권력의 차이를 직시하고 강자가 그 힘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각자가 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송은 늦고,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p.190)기 때문에 약자는 부당한 현실과 강자에 맞서 당장 시끄럽게 싸울 수밖에 없다. 그 상황을 헤아리고 투쟁에 지지를 표하는 것도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권위에 반기를 드는 사익을 옹호하려는 불온한 시도가 만들 불온한 평화를 함께 상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