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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건 과연 학습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지피 작가의 그래픽노블(그림소설) '아들의 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사랑이 학습이냐 본능이냐를 가르는 것이 포인트는 아니다. 그 의문은 사실 인류에게 사랑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나아가 사랑을 모르는 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의 또 다른 버젼일지 모르겠다.

그래픽노블이란 참 신묘한 장르다. 칸칸으로 레이 아웃된 만화의 영역으로 보려니 그림 한 컷 한 컷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고, 내러티브의 흐름상 소설로 보자니 이미지가 주는 시적 효과가 매우 짙다. 특히 '아들과 땅'의 경우, 지구 종말 이후의 척박한 삶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가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도 뛰어나지만 연필의 질감과 두께를 생생하게 살린 그림체 또한 몰입을 높여주는 부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 없어도 충분히 의미로운 이야기 일테지만 그림으로 인해 마음으로 스며드는 속도가 달라졌다고 할까.

어느 출판 기념회에서 9살 아들을 둔 한 아빠가 지피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아이가 만화를 지나치게 본다고, 그래서 만화가 없는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고. 이 질문에 대한 지피 작가의 대답이 기막히다.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만화는 없어도 됩니다."

작가에게 있어 그래픽노블은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하나의 수단이고, 그에게는 그것이 우연히도 그래픽노블 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음악이나 시 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장 전하고 싶은 하나의 메세지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지구 종말 이후, 비극의 땅에서 두 아들이 살아 나가도록 하기 위해 아비는 두 아들을 생존 본능에 충실한 야수로 키우기로 마음 먹는다. 활자의 존재를 숨기고 감정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금지 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무자비 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행동은 다름 아닌 두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갑자기 죽은 아버지, 두 아들에게 성서처럼 남겨진 활자로 빼곡한 군데군데 눈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얼룩으로 흐려진 아버지의 일기...그러나 두 아들은 일기장을 읽는(해석하는) 법을 모른다. 두 아들은 앞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위험천만한 두 아들의 서사의 끝에 남은 것은 아비가 그토록 금지 시킨 사랑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야 말로 종말 이후의 땅을 아들의 땅으로 바꿀 힘(또는 희망)임을 암시한다. 어둡고 긴 터널을 걷고 또 걸어 저 멀리 간신히 발견해낸 출구의(일지도 모를) 작은 빛처럼. 그리고 두 아들이 발견한 그 빛의 직경이 지금은 비록 작디 작을지라도 나아갈수록 직경의 너비가 커지기를 나는 어느새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들의 땅을 보면서 참 신기한 점이 하나 있었다. 감정의 표현법과 활자를 학습하지 못한 채 야수로 자라난 두 아들의 얼굴이 초반에는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갑작스레 아버지가 죽은 뒤,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이어 나가던 그들의 표정이 점점 풍부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솔직히 확신은 못하겠다. 그건 어쩌면 작가의 의도 였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다만, 두 아들이 그들의 여정을 통해, 비록 그걸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지언정 드디어 발견(학습) 하고만 '사랑'이란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예상해 볼 따름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하여 사랑이 아닐까. 언제였던가 나는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살고싶기에 사람하고 사랑하자-고.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묻고싶다. 사랑은 과연 학습되는 감정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

익명이 주는 소리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21세기의 우리네 삶이 전쟁터라면, 우리가 애써 기억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가장 가까이 혹은 가장 깊숙히 있어 보이지 않던 그 한 가지, 우리가 지금 건져올린 바로 그 한 단어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피 작가는 사랑만 있다면 만화(음악, 미술)은 없어도 된다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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