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기회 없이 맏이로 태어나 여러 일을 행하며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심장 깊숙이 자리하였다. 밥 지을 때는 어김없이 돌아와 친구들과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 밥상을 차리는 동안 놀다 들어온 남동생은 수저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남녀 차별을 느끼며 살아와서인지 머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해방ㆍ자유ㆍ존중ㆍ배려ㆍ공감ㆍ소통’ 등의 단어가 좋아졌다. 학인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를 꾸준히 해온 작가가 쓴 << 해방의 밤>>은 곁에서 책 이야기에 일상을 버무려 소담한 밥상을 차려 놓은 듯하다.
밥 먹을 대상을 떠올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정성스레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따스해지는 광경을 그리며 책을 읽었다. 글쓰기 공부를 함께하던 사람들과의 인연은 강좌가 끝이 났어도 면면이 이어져 햇살 말간 낮에는 전하지 못한 글들을 주고받았다. 무딘 감성을 깨우는 비라도 내려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추억 속 인물을 불러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아련한 그리움에 잠길 때가 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어머니의 열망을 담은 학인의 글을 보고는 충청도 할매들의 <<요리는 감이여>>라는 책의 감칠맛 나는 음식에 쏠린다.
밤이라는 시간은 원기왕성한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에 자리를 내어 주고 사위를 감싸기 시작할 때, 내면의 감각을 일깨우는 사유의 깊이를 짙게 돋운다. 지난 시절 겪은 일들 중 지우지 못할 상처는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일상이 매끄럽지 못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받은 피해를 글로 남겼다. 고압적이고 물리적 인 힘에 짓눌려 치욕스런 일을 겪고 휘청거리는 자신을 다독이며 자정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글쓰기 시간의 숭고한 의식으로 비춰진다.
다르게 생각하며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관행대로 살아가려는 습성으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때가 있다. 기득권으로 지내다 보면 기존의 질서가 어그러져 혼란을 가중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자신과 맞닥뜨렸을 때의 무참함이 떠올라 괴란쩍어진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는 나이지리아 상류층 가정의 10대 소녀가 밖에서는 존경받고 집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가는 성장 서사를 담았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처럼 히비스커스 색깔에도 보라색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성취만을 위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삶보다는 타인을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길이 더 나은 방법일 것이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나라라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한 개인을 존엄한 유기체로 여기지 않고 기계의 부품처럼 여겨 한 노동자의 주검을 사고로 처리하는 현실에서 유족의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로 열일곱의 고등학생들이 수장되었을 때에나 이태원 참사로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에도 책임 있게 나서서 유족의 아픔에 함께하려는 권력층은 흔치 않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직시하고 피붙이를 잃은 유족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하는 공감 능력은 개개인을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할 것이다.
양성 평등 사회로 진화하여 여성들의 삶이 많이 편해지고 나아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목도한다. 함께하자는 말 대신 도와줄게라고 말을 버젓이 하는 남편을 보면서 변화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만들어야 하는지를 일깨우게 된다. 능력대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출발선이 다른 사회적 환경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적 논리를 펴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용기를 배운다. 애초부터 개인의 능력이 판가름 나는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기억하며 관념의 빗장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