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지나온 세월 동안의 경험과 기억들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한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민코프스키는 이와 관련하여 ‘체험되는 시간 (Le temps vecu)'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각자가 개별적인 체험을 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세상과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옥선 작가의 <즐거운 어른>은 동일한 시공간 내에서 유사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듯 하지만, 동시에 체험되는 시간 안에서 지극히 개별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에세이다. 특히, 작가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담은 자신만의 삶의 체험적 진리를 건낸다. 또한, 자신이 겪어온 세상과 체험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든 그르든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새로운 판을 짜야 옳다. (p. 26)'고 언급하며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즐거운 어른>을 읽으며 같은 듯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체험되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한 인간을 조명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도 있고, 붓을 들고 한땀 한땀 그려볼 수도 있다. 또한, 최근 유행하는 사진을 지브리풍 그림으로 변형해주는 생성형 AI를 활용해볼 수도 있다. 이 중에서 사진과 초상화라는 극명하게 다른 방식의 차이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진이 인물의 순간적 속사(速寫)로 한순간의 단면을 담는 것이라면, 초상화는 긴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빛 속에서 일련의 특징, 감정, 생각을 가진 개인의 다양한 모습, 지금까지 한 번도 동시에 드러난 적 없었던 여러 부분을 깊이 있게 담아낸다.
따라서,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 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까울 수 있고, 특히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볼 때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과거의 역사와 함께 했던 기억을 같이 떠올릴 때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림에는 한 사람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본 만큼의 시간성이 농축되어 있어,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간과 빛을 거치며 덧입혀진 개인적 삶과 역사가 녹아 있는 초상화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한 사진 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체험되는 시간’은 상대를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이 아닌 영원을 지향하는 초상화의 이미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
초상화의 또 따른 매력은 초상화의 주인공 (그려지는 대상)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지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훌륭한 화가일수록 사진의 매력을 넘어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옥선 작가는 훌륭한 화가이다. 현재의 세상의 스냅샷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진사가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또한 변화되는 세상을 어떻게 맞이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하는지 독자들에게 조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불완전함과 취약성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인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용기와 위로를 나누는 것은 서로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일정 부분 해소해줄 수 있는 심연과 어둠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뢰와 공감을 기반으로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죽기전 아무도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거나 더 많은 권력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고 더 행복한 상태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p. 38)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누구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생의 무게가 있는 법' (p. 113)이고,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인생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p. 114)라는 것,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기대 없이, 스스로의 명랑성과 가벼운 마음가짐에 기대는 것' (p. 49)이고 '인생살이에서 보통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량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제일 좋은 것' (p. 113)이라는 작가의 말에 개인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서 고고학자가 되어 내 자신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되돌아보고, 화가가 되어 나와 '체험되는 시간'을 맺어 온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게 한 과거를 기반으로 가뿐하고 유연하게 의미 있는 현재를 보냄으로서 미래를 대비하자는 작가의 말은 한동안 살아가는 지침이 될 것 같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갈 것들이다. 그러니 인간끼리의 관계를 너무 심각해하지 말고 가뿐하게 생각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다." (p.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