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내에서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한국, 이 민족적 비극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국독립과 남북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민족적 비극의 근원인 동시에 올바른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 민주국가 수립 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달성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비극적 시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현재 우리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소설 <유령의 시간>은 이 엄혹한 시기를 겪으며 역사의 주변인으로서 삶의 기반과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해온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과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 유지라는 명목으로 행해졌던 국가의 폭력과 부조리를 조명하고 있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분열로 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자에게는 삶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조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믿는 사상과 신념에 따라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걸음을 내딪는다.
"가난허고 무식헌 것들이 믿고 의지헐 디 웁는 판에 빨갱이 시상 되먼 지주 다 처웁애고 그 전답 노나준다는디 공산당 안헐 사람 워디 있겄는가요. 못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들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소설 태백산맥 中)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사상의 생몰(生沒)을 잘 표현하고 있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는 당시 오만의 읍민들 중 팔할이 농민이었고, 그 농민들 중에서 구할이 소작인이었다. 벌교뿐만이 아니라 해방 당시 한국은 전 농가의 86%가 소작농이었고, 전농지의 64%가 소작지였을 정도로 농업은 핵심적 경제기반이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갑오농민혁명, 일제하의 소작쟁의에 이어 토지제도의 모순이 당시 주요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등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들은 지식을 통해 현실의 모순구조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체험을 통해 그 문제상황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고, 시대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대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개인적 동기는 사회갈등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다시 집단적 이념으로 확장되었다. 소설 속 문서방의 한 맺힌 외침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中에서 –
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을 읽으며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는 아버지의 삶을 한 마리 새우로 표현한다. 그 새우는 양식장의 바람 부는 호지 밑에서 온몸으로 물결을 버텨내던 한 마리 등 굽은 새우였고,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였다. 이 소설을 통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차갑고 어두운 현실을 견뎌내며 자신이 믿는 지향점을 따라 뜨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던 삶들이 다시 조명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를 통째로 집어삼킨 사상이란 것도 결국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냉정한 과학의 시선은 감정과 열정, 자유, 해방감 등 이 모든 것을 절제하고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순간은 사랑과 감정, 열정과 자유를 한껏 꽃피웠을 때가 아니던가?
"솔직히 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안드네. 다만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겠지." (p. 134)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뜨겁게 하고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 (p. 271)